#3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

2010.1월 / 아이티 취재기 : 1편

by 물구나무서기


윗 사진은 중남미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 간에 있는 국경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미니카에서 아이티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저 파란 대문을 지나면 국경을 넘게 됩니다)


(출처:구글지도)


아이티가 우리나라에 크게 알려진 것은 2010년 1월 대지진 때입니다.

제가 기자로 근무할 때인데, 당시 아이티로 '급파'됐습니다.

국경이 원래 허술하긴 하지만 대지진으로 인해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게 없는 때라서 더 그랬습니다.


2010년 1월의 시간을 둘러보고자 합니다.

제목처럼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고 난 뒤 썼던 글인데

적어도 저는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제가 그곳에 갔고, 먹고, 자고, 지진을 겪고, 지금 여기서 브런치를 하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글로써 생생히 표현되지 못해 아쉽지만

그때의 흔적을 찾으니 가슴이 콩닥콩닥거립니다.

(1, 2편으로 나눠 싣겠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돈 주고 점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다 이 원칙을 깬 게 2009년 4월입니다. 당시 회사 축구팀에서 골키퍼를 했는데 살이 쪄서 축구도 잘 안 풀리고, 30을 앞둔 나이에 그냥 답답해서 점집을 찾아갔습니다. 신문에 잘 알려진 철학원이었는데, 이곳 원장님이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2010년에 결혼운이 있다’이고, 둘째는 ‘2010년에 일이 매우 많은데 특히 외국으로 나가는 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스포츠부에 있어서 ‘원장님이 내년에 남아공 월드컵, 밴쿠버 동계올림픽 있는 것 정도는 아시는구나’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2010년 1월1일 사회부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스포츠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해외출장이 드문 곳이지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티 출장을 제가 가게 됐습니다.



"함께 아이티로 가시죠"



구호단체 굿네이버스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2010년1월14일 오후 3시쯤입니다. 짬을 내서 제 담당취재구역(중부라인)의 숙명여대로 가던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굿네이버스가 용산구에 있어서 담당기자인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즉각 캡께 보고를 드렸고 30분 후쯤 오케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발생한 건 12일. 이미 이틀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굿네이버스와 저는 ‘일단 빨리 가야 한다’는 것에 뜻을 같이했고, 비행기 일정이 잡혔습니다. 4시간여 뒤인 오후 8시 인천공항에서 뜨는 비행기였습니다.


부랴부랴 종로의 자취집으로 가서 짐을 쌌습니다. 일단 옷부터 집어넣고 여권 등을 챙겨 용산구의 굿네이버스 사무실로 이동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티로 간다는 게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냥 중미의 한 나라에 지진이 났고, 그래서 취재를 하러 간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함께 아이티로 갈 직원을 만나 공항으로 출발할 때 약 20여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무사히 잘 갔다 오라”며 마중을 해주는 것을 보고 ‘이거 큰일 났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대략의 기사계획을 써서 올리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부모님도 아이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셨기 때문인지 ‘잘 갔다 오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용돈 30만원을 아버지께 폰뱅킹으로 드렸습니다. 전날 전화해서 ‘잘 지내느냐, 돈 쓸 일이 있는데 좀 모자라다’는 말씀을 바빠서 건성으로 들었던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20만원쯤 달라고 하셨는데 왠지 더 넣어야 할 것 같아서 10만원을 더 넣었습니다.


험난한 취재를 예고하듯 아이티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습니다. 인천에서 미국 LA와 뉴욕을 거쳐 아이티 인접국인 도미니카공화국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거의 이틀이 걸렸습니다. 비행기표를 급하게 끊은 탓에 자리는 항상 복도가 아닌 창가 쪽이나 가운데 자리였습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시차 때문에 아무리 이동을 해도 시계를 보면 제자리인 듯 한 느낌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에 몸을 맡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미국은 검색이 강화돼 검색과정에서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요돼 사람 진을 빼게 했습니다. LA에서 뉴욕으로 갈 때엔 검색 때문에 비행기 출발시간 2분 전에 게이트에 도착,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비행기에 탑승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도착했지만 아이티공항은 매우 제한적으로 비행기가 오가고 있어서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아이티까지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일단 차를 렌트해서 5시간여를 달려 국경으로 이동했습니다. 국경은 이미 활짝 열려서 왕래가 자유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아이티에서 머무를 곳이나 상황을 알려줄 한국인을 국경에서 만나 도움을 받아 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신이 두절돼 전화도 먹통이었고, 대사관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국경에서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쯤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한국말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한 20대 한국여성이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하고,


“네? 한국분이세요? 한국분 맞으세요?”


라고 거듭 물었습니다. 수차례 맞다는 대답을 듣고, 어떻게 이곳에 있느냐고 물으니 ‘ESD라는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에너지회사의 직원인데 아이티에 발전소를 건립 중이다. 지진이 나서 도미니카로 잠시 나왔는데 오늘 현지인 직원들을 국경에서 만나 식료품을 주러 왔다’는 것어었습니다. ‘현지인 직원들은 아이티로 다시 들어간다’는 말도 들었고, ‘도미니카대사관의 한국인 참사관이 아이티 현지의 ESD 사택에 머무르고 있다’며 그 집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현지인 트럭에 함께 타고 아이티 입성에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정말 운도 이런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일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아이티에는 꼬박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16일 첫날 도미니카에서 국경을 넘어 아이티로 건너간 날부터 취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개인 또는 단체라도 걸어서 시내를 취재하는 것은 위험해서 절대 안 된다는 얘기를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불안한 치안 때문이었습니다. 첫날 머물렀던 사택뿐 아니라 모든 곳의 전기가 끊겼지만, 사택에는 다행히 자가발전기가 있어 제한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이티에서도 인터넷은 사용이 가능하더군요. 무선인터넷을 썼는데 한국에 비하면 이게 인터넷인가 싶을 정도로 느려 인내심을 키우는 데 매우 유용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이티에 머물면서 3~4차례의 여진을 겪었는데 처음 겪은 건 17일입니다. 이날 새벽 사택 건물 2층의 한 방바닥에 수건을 깔고 자는데 어지러운 느낌에 같은 방에서 자던 굿네이버스 직원과 타사 기자, PD 몇 명이 함께 눈을 떴습니다. 이때 만해도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지진 불감증’이 있었던 터라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