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월 / 아이티 취재기 : 2편
1편에 이어 올립니다.
아이티 취재 중 위험했던 순간의 절정은 18~20일입니다. 18일에는 현지에 도착한 한국 119구조대와 함께 참사 현장으로 취재를 가는 날이었는데 이날 하루에만 큰 사고 3번을 겪었습니다.
오전에는 제가 타고 있던 승용차와 현지인들이 타고 있던 오토바이가 강하게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살면서 내가 탄 차가 사람이 훤히 보이는 오토바이를 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양쪽 모두 큰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교통사고는 오후에 일어났습니다. 구조대와 함께 트럭 뒤쪽 짐칸에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제가 앉아있던 자리 뒤쪽으로 소형 트럭 한 대가 정면충돌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제가 타고 있던 트럭이 워낙 튼튼해서인지 허리가 좀 얼얼한 것 빼고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사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은 취재를 끝낸 뒤 트럭을 타고 구조대 캠프로 돌아가던 길에 또 일어났습니다. 트럭 뒤쪽 짐칸 양쪽에 있던 ‘칸막이’가 차가 도로를 쌩쌩 달리는 도중 그냥 뒤로 홀라당 젖혀지면서 열려버린 겁니다. 칸막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구조대원 몇몇이 넘어가는 칸막이를 힘껏 잡은 덕분에 사고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트럭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듯 뒤로 돌아 땅으로 처박혀버릴 위기였으나 아마 살 운명이었나 봅니다. 날랜 구조대원의 손놀림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사고는 아니지만, 더 강한 게 남아있었습니다. 20일 오전 겪은 진도 6.1의 여진. 제가 살면서 생명의 위협을 가장 심하게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자다가 느낀 여진에 눈을 번쩍 뜨고 정말 ‘개처럼’ 기어서 건물을 탈출했습니다. 왼쪽 팔과 오른쪽 팔 곳곳에 찢어지거나 찰과상을 입었고, 양쪽 무릎엔 피멍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18일에 참사 현장에서 샌드위치처럼 내려앉은 건물 천장에 깔려 죽은 사람들을 봤던 직후라 두려움은 더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난 이렇게 죽을 수 없다’
건물에서 미친 듯이 기어 나왔습니다. 이날 여진을 겪은 뒤에는 절대 건물 안에서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국내 언론과 외신에 보도된 대로 아이티 현지는 시신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거리에 널려진 시신은 거의 수습을 했지만, 폐허가 된 건물 안에 있는 시신은 거둬들일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시신 썩은내가 마스크를 뚫고 콧속으로 파고들 정도입니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트림을 했는데도 썩은내가 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아이티로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단순히 지진이 일어난 나라로 재해현장 취재를 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진을 ‘살벌하게’ 겪고 나니 저도 사람인지라 회사에 야속한 마음이 야금야금 들기 시작했습니다. 타사 기자들은 하나 둘 돌아가는데, 나는 언제 돌아가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행히 22일 오후에 귀국길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회사가 지진보다 무섭다’는 생각을 한 건 21일 저녁입니다. 귀국 전날 저녁에 갑자기 아이티 유엔 평화유지군의 유일한 한국인인 이선희 소령 인터뷰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냥 인터뷰도 아니고 신문 한 면을 통째로 쓰는 인터뷰였습니다. 이 소령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했지만, 한국 합참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합참의 허락을 받았지만, 다음날 오전에도 이 소령은 바쁘다며 인터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로 무작정 쳐들어갔습니다. 인터뷰를 하지 못하면 저 또한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는 아이티 현지에서 고아원을 운영, 이 소령과 친분이 깊던 백삼숙 목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저는 아이티에서 숙식 대부분을 백 목사님의 고아원에서 해결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새벽 2시까지 마당에서 랜턴을 켜놓고 전화기를 붙잡고 일하던 모습이 기특해서 도와주셨다”고 했습니다.(사실 저는 그때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거의 울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도움으로 이 소령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면 인터뷰를 술술 풀어갈 수 있게 해 준 건 제 군생활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2001~2003년 특전교육단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에서 해외로 파병을 가는 부대는 항상 교육단에 모여 몇 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출국하곤 했습니다. 마침 이 소령 또한 2003년 동티모르 파병을 앞두고 교육단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 있었던 인연을 끄집어내 이 소령의 마음을 한결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티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를 떠나는 날인 22일도 그리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굿네이버스 직원들의 차를 얻어 타고 육로로 아이티를 빠져나가는데, 도중에 승합차에 펑크가 나서 이를 고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등 좌충우돌이었습니다. 타이어 교체를 위해 들어 올린 차가 갑자기 주저앉는 바람에 열어놓았던 트렁크 문 모서리에 한 선교사님이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는 등 마지막까지 사고는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오후 11시쯤 도미니카공화국 굿네이버스 사무실에 도착, 밤새서 기사를 완성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현지시각으로 23일 오전 11시 비행기를 탔고, 인천공항에 25일 오전 7시 도착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번 출장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뜻깊은 출장이었습니다. ‘이런 출장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회사에서 로밍폰도 못 받고 출장을 갔기 때문에 전화요금은 1원도 안 나왔습니다.
잠은 17일부터 귀국하기 전날까지 쭉 백삼숙 목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가서 지내며 주로 마당에서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백 목사님은 눈치 하나 주시지 않고 몰려드는 한국의 ‘기자 고아들’에게 신라면과 쌀밥, 김치 등을 아침과 저녁식사로 주셨고 마당과 건물 안에 잠자리도 제공해주셨습니다. 점심은 굿네이버스가 챙겨간 초코바 등으로 해결했습니다. 일면식 없는 이들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물심양면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귀국이 가능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굿네이버스에 성금 후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적은 돈이나마 정성을 보태려고 합니다. 굿네이버스는 아이티에 장기적인 지원을 위해 지부를 설립할 계획인데 농담 삼아 제게 “아이티 지부장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합니다. 아이티에서 함께 고생했던 굿네이버스 직원, 타사 기자 및 PD들과는 한국에서 만나 삼겹살을 먹기로 했습니다.
<지진에도 가려지지 않는 아이들의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철학원 원장의 말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나옵니다. 사회부 오자마자 초반에 내근을 이상하게도 많이 서는 바람에 제가 아이티에 있는 열흘 동안에는 내근을 바꿀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철학원 원장의 말대로 이제 남은 건 올해 결혼하는 일뿐인가 하는 생각에 저 혼자 실없이 웃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