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

by 수리향

날이 차졌다. 어제까지 여름 이불을 덮다가 한 겹 두터운 이불을 꺼내 덮었다. 비 내음에 수척해진 바람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비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면, 다소 안심을 한 비 같다. 가장 싫어했던 0도 1도 아닌 상태를 벗어나, 예상은 했지만 0인 상태가 되었다. 그걸 깨닫는 순식간에 불은 꺼지고 다시 차가운 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씩 쏟아져 나오는 다음 스텝들을 보며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 이 날을 위해 2년을 기다렸던가. 글쎄, 아직 넉 달의 시간이 더 남았고 그 시간 동안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는 없지만. 참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1-2년은 기본으로 인내하고 노력해야 하는 그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도 쉬운 게 없는데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의 중간중간에 만난 모든 것들에 충실하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한발 한발 꾸준히 나아가며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재주가 없는 인간이 기회의 여신에게 바칠 수 있는 하나뿐인 대가가 아닐까.


하지만 또, 차갑게 식어버린 용광로처럼, 남은 것들은 이미 고철이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나의 발걸음이 변수가 되어 파란이 올지 모른다는 걱정. 나는 더는 파란에 휩쓸려 망신창이가 되고 싶지도, 스스로를 재물로 바치고 싶지도 않다.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수십 가지 생각을 하고 딛고 생각하고 고뇌하였는데, 그 길들이 오롯이 나락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를 바란다.


새로운 길로의 선택은, 그 미지의 두려움은 나를 고동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차가운 소용돌이를 만나지 않기를, 그 자체가 소용돌이가 아니길.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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