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일요일 밤

by 수리향

일요일은 그렇게 쉬이 지나가 버렸다. 새벽부터 당근과 함께 부비적거리던 하루가 그렇게. 그리 아끼던 것들을 하나씩 보내고 이제 자잘한 것들만 버리면 되는구나.


생각보다 쉽게 빠르게 정리되었다. 가장 빠르게 정리되었던 녀석은 역시 크고 아름다운 돕. 내 몸만 한 녀석은 나에게 미지의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었었지. 하지만 너는 너무 크고 무거워 데려갈 수 없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바쁘단 핑계로 그동안 많이 데리고 다니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 새 주인에게 아름다운 우주를 보여주렴.


짐을 많이 넣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어느 사이 작은 집 안에 가득 찬 물건들을 볼 때마다 사람의 물욕은 어쩔 수 없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음식도 이제 냉장고에 있는 것을 다 먹기 전까지는 사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귤 한 봉지를 사들고 휘적휘적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살짝 좌절을.


냉장고에 가득한 김치를 볼 때마다 과연 이것을 가는 날까지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그 마음에 담긴 깊이를 알기에 아직 꺼내지 못하는 말이 더 암담하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하는데, 가까울수록 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게 맞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들 때가 있다. 그렇게 청운을 안고 걸어왔던 길들이 누군가에 의해 막히고 나 혼자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지.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세상은 넓고 복잡한데 나 하나만 걸어간다고 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항로가 환영받지도 않는다.


몸을 사리면 결국 더 많은 가시덤불에 찔리기만 하고 그래서 차라리 더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확실히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덜 찔리고 있다. 아직 이 가죽에 젊음의 빛이 있을 때 거침 없이 나아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덜 아플 테니까. 하지만 그 까마득함에 이제 겨우 한발 내디뎠는데 그것이 끝없는 낭떠러지 일지, 박쥐와 지네만 가득한 동굴 일지 두렵다. 가장 두려운 건 그 길고 긴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국 또 나 혼자 일지 모른다는 사실. 그건 이제 익숙해야 하는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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