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유
출국 시점부터 읽기 시작한 태백산맥(조정래)을 드디어 완독 했다. 5주 넘게 걸렸는데, 막판에 격리 해제되면서 정신이 쇼핑과 먹을 것에 집중되어 조금 게을러졌던 것 같다. 아무튼 10권의 대장정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아 기쁘다. 마지막에 염상진이 죽으면서 좀 허무하게 끝난 감이 있어 아쉽다. 작가도 그걸 잘 아는지 그 뒤의 이야기로 ‘한강’을 냈다고 한다. 별일 없으면 읽어볼 생각이다.
태백산맥은 해방 후에서 6.25 전쟁 이후 분단이 되면서까지의 벌교와 지리산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벌교가 가상의 지명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전라남도에 위치한 마을이더라. 아무튼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분단의 상황에서 빨치산이 주인공인 소설이 만년 베스트셀러였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좌익들이 대부분 선하고 의로운 인물로 그려지고 우익들은 대부분 일제에 부역하다 미군정에 붙은 기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문학적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소설은 대중들의 공감을 먹고사는데, 해방 직후 남한 정권에 대한 불신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 깊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당시를 살지 않은 나로서는 어떤 것이 답인지 알 수 없다. 살았다고 한들 서로의 상황에 따라 답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허구이지만 상황은 허구가 아니라는 작가의 말을 통해 한국의 좌익과 우익의 얽히고설킨 애증이 참 뿌리 깊은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적으로 드러난 것인 염상진과 염상구 형제인데, 빨치산 형 염상진과 청년단장 동생 염상구는 어떻게 한 배에서 저렇게 다른 인물들이 나올 수 있을까 싶다. 쓸데없이 정의로운 염상진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랄하나 싶은 염상구. 하지만 염상구의 그런 행동은 사상이라기보다는 형 염상진에 대한 질투와 인정에 대한 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염상구뿐 아니라 여기서 좌익들도 공산당 이념 자체에 빠지기보다는 대부분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선택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우익이라고 해도 전 원장이나 김범우와 같이 민족주의를 가지고 정권에 협조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나온다. 무당 소화의 경우는 그냥 사랑 때문에 정하섭의 좌익 활동을 돕는다. 대부분 완전한 ‘선’이나 ‘정의’보다는 ‘정’이나 저마다의 ‘사정’을 지니고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조정래는 이 소설을 통해 이념과 사상이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민족을 와해시키고 분단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는 2권쯤 손승호의 입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 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 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 도구일 뿐이오. 봉건 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의 인간들이, 지배 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 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한국의 근현대사는 상당히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 같이 뼛 속까지 이과적인 인간은 사회, 역사, 한문 등의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해서 뭐가 뭔지 사실 잘 모른다. 사실 스마트폰만 켜면 신기한 것이 많은 세상에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며 살아야 하나 싶은데,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 뿌리가 나에게 주는 영향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한국은 아직도 좌우지간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잘 이용할 수밖에 없는지 조금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싶다. 한국의 복잡 다단한 근현대사가 궁금하신 분들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단, 검열삭제가 많으므로 어른이들만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