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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기

by 수리향

수도꼭지를 빨간 부분으로 돌리면 당연히 따뜻한 물이 나올 줄 알았다면 당신은 중국에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도시가스로 난방과 함께 온수를 함께 돌리지만 중국에서는 난방 시스템과 온수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샤워를 할 때마다 온수기를 틀어야 한다. 정확히는 물이 데워지는 시간이 30-60분 정도 들기 때문에 샤워 전에 온수기를 틀어야 한다. 온수기를 하루 종일 틀어 두면 하루 종일 따뜻한 물을 쓸 수 있지만 전기세가 어마어마하게 나가기 때문에 나의 경우 샤워하기 1시간 전에 온수기를 틀고 샤워 후 바로 꺼버린다. 그것도 용량이 적은 편이라 샤워도 빨리 끝내야 하고 이래저래 까다로운 온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까다로운 온수기라도 있을 때가 고마운 것이란 걸 깨달았다. 온수기가 고장 나 버린 것이다.


사건은 연길 시 봉쇄 중에 발생하였다. 그날도 저녁 9시가 넘어서 심야 전기 요금으로 물을 덥히고 있었는데 갑자기 삐삐 소리가 났다. 다락방에서 열심히 독서에 심취 중이던 나는 처음에는 그 소리를 잘 못 들었었다. 하지만 아련히 여러 번 들리는 소리에 '혹시 냉장고가 열렸나?' 하며 밑으로 내려갔는데, 화장실에서 금속 탄 냄새와 함께 온수기가 멈춰 있었다. 물 온도가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다른 것을 태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여러 번 초기화하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주인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나는 주인께서 엄청난 금액(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의 온수기 수리금을 나에게 청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집주인은 오히려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최대한 빨리 온수기를 다시 설치해주겠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고장 난 적이 있어서 온수기를 갈아야 할 때였던 것 같았다. 진실을 숨기고 내가 고장 낸 걸로 하고 수리비를 청구해도 되었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문제는 봉쇄 기간이라 온수기 배달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길 시 도로에는 보건과 공안 차량 외에는 단 한대의 차량도 다닐 수 없는 때였다. 택배 차량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봉쇄가 끝날 때까지 온수기 설치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봉쇄는 일주일 뒤에 풀렸고 택배는 순조롭게 도착했다. 연길 시는 그 뒤로 사실상 봉쇄가 해제되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 단 한 곳, 학교만 봉쇄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은 다행한 일이었는데 샤워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라서 학교로 출근하면 그것 나름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무튼 온수기가 배달 와서 설치될 때까지 장장 2주의 시간 동안 나는 찬물로 샤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어렸을 때 단수는 여러 번 경험해보았어도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일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씻는 걸 귀찮아하는 편이고 봉쇄 기간이라 나갈 일도 없었지만, 며칠 지나니 가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가스레인지에 물을 덥혀서 찬물과 섞어 머리도 감고 몸도 씻는 수밖에 없었다. 워낙 냄비가 작다 보니 1-2번 데운 물로는 평소에 하던 것처럼 물을 펑펑 쓰면서 샤워를 할 수 없어서 불편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곧 익숙해져서 얼음장 같은 찬물로 머리를 헹구는 일 정도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찬물 샤워에 익숙해져 갔을 무렵 온수기가 배달되고 우여곡절 끝에 어제 설치 기사님이 오셔서 새로운 온수기가 설치하고 갔다. 설치 기사와 집주인이 가고 나서 오랜만에 따뜻한 물을 펑펑 쓰며 샤워를 했다. 냉골에 세수가 제대로 안 되었던 것인지 얼굴에 까지 때가 가득한 것 같았다. 간만에 샤워를 해서 뽀송뽀송해진 얼굴을 보니 기분도 좋고 머리도 덜 가려운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 오늘은 한인 마트에서 세면 용품을 잔뜩 사 가지고 돌아왔다. 추운 걸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도 신기하고 온수 좀 나왔다고 사람의 기분이 이렇게 좋아지기도 하는구나 싶다. 이제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맛있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니... 다이어트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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