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이 너무 좋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풀려서 더워 죽을 지경이다. 밖에는 그래도 바람이 불어서 시원한 편인데 방 안에 쪼그려 있자니 더워서 결국 미적 거리는 몸을 움직여 쇼핑 겸 바람을 쐬러 갔다. 나가고 보니 얼마 전 산 코트가 날씨에 제격이었다. 며칠 뒤면 더워질 거라더니 역시 현지인의 말이 정확했다. 아무튼 품도 커서 바람막이로 제격인 얇은 코트를 걸치고 휘적휘적 다니다가 나의 로망이던 붓글씨 용품과 내 얼굴만 한 빵을 사 왔다. 내 얼굴만 하다는 것은 너무 겸손한 표현이고 내 얼굴의 2-3배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내 얼굴이 작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기 빵이 좀 크다. 물론 베이커리에서 파는 아기자기한 빵도 있는데 요즘은 저렴하고 맛 좋은 마트 빵을 시식하는 중이라 특별히 마트에서 큰 빵을 샀다. 일주일 내내 뜯어먹어도 될 것 같은 이 큰 빵이 13위안 밖에 되지 않으니 내가 밥을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덕분에 나의 냉장고는 때 아닌 식자재들의 썩는 냄새로 아우성이다.
중국에서 한국 음식 먹기 어렵다고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연변조선족자치구이고 곳곳에 김치 전문점이 있고 김치 및 장류를 저렴하게 팔고 있다. 한국 떠나기 전에 한 달 동안 김치만 먹어서 (냉장고 있는 엄마 손 김치를 처분하기 위해) 다시는 김치를 쳐다도 안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슬프게도 격리와 봉쇄 기간 동안 가장 만만한 반찬은 김치였다. 손도 안 가고 보관 용이하고 안 상하고 볶음밥을 먹어도 찌개로 먹어도 뭘로 먹어도 간편하고 이런 효자 반찬이 또 없더라. 하지만 덕분에 우리의 신선 야채들은 후순위로 밀려 신선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대체로 야채가 주식인지 고기보다 초록색 야채를 사는 비중이 높다. 나도 격리 전에 사람들 따라서 사다 보니 가지, 버섯, 당근 같은 야채들을 사두었는데 거의 먹지 못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썩기 일보 직전이 된 것이다. 그나마 초록 야채들은 손질할 줄 몰라서 안 샀기 망정이지 샀으면 냉장고는 초록 진물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솥단지 만한 빵을 넣을 자리를 만들다 보니 냉장고에서 자연스럽게 치워진 죽어가는 야채들을 보며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녀석들의 생명을 이리 헛되이 보내다니, 비장한 마음으로 먼지 쌓인 프라이팬을 꺼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들을 해치우리라.
중국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여기 와서 깨우친 바가 있다. 중국 요리는 딱 3가지만 있으면 완성된다. 첫 번째, 아름다운 화력을 자랑하는 불판. 두 번째, 죽은 음식도 살려낸다는 이금기 소스. 세 번째, 중국식 고추기름인 라오깐마. 딱 요 3가지만 있으면 어떤 재료든 훌륭한 중화요리로 만들어 준다. 일단 남은 모든 야채들과 남은 면을 (정말) 대충 손질하고 프라이팬에 불을 올린다. 불은 강강과 약약 밖에 없으므로 그냥 강강으로 두고 계속 볶으면 된다. 2달 묶은 양파를 필두로 야채들을 대충 볶다가 이금기 소스 휘리릭 두르고 조금 깊은 맛이 필요하다 싶으면 진간장을, 좀 매운맛이 필요하다 싶으면 라오깐마를 한 스푼 넣으면 된다. 그럼 모든 요리에 적당한 불맛이 나는 중화요리가 탄생한다. 비주얼은 별로지만 한번 맛보면 내가 한국 가서 교편이 아니라 중식당을 차려야 할 것 같은 진지한 고민이 들 정도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도 라오깐마와 이금기 소스는 어디든 구할 수 있으니 꼭꼭 최대 화력으로 저렇게 먹어보기 바란다. 이렇게 만들면 당신도 오늘은 짜파…, 아니 중화 요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