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은 교사의 제2의 휴가 기간이다. 시험 문제를 다 낸 교사는 진도도 나갈 수 없고 할 수 있는 게 복습 밖에 없는데 3 배수 퀴즈까지 모두 만들어 두었으니 남은 건 시간을 죽이는 일뿐이다. 시험 문제를 검토해야 하지만 그건 평일로 미루고 날이 좋아서, 날이 살짝 흐려서 주말여행을 가기로 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새로운 곳이니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다. 처음에는 서시장에 가서 자전거나 전동 자전거를 사서 돌아다닐까 했는데 부피가 큰 물건은 절대 사지 않겠다는 다짐에 따라 그냥 발로 다니기로 했다. 남쪽으로 길을 잡고 열심히 걸었다. 남쪽으로 가다 보면 룡정에 닿는다. 윤동주와 일송정이 있다는 그 용정촌. 날은 햇살이 강하지 않아서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출발이 좋아 강변에 이르렀을 때 듬성하지만 아름다운 꽃나무가 나를 반겼다.
꽃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그냥 사진만 찍었다. 벚꽃 같기도 하고 배꽃 같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의 이름은 역시 외우기 어렵다. 그렇게 꽤 긴 강을 건너서 열심히 걸었다. 고속도로 입구 쪽에서 택시 기사님들이 호객행위를 하는데 그냥 지나쳤다. 나는 연길에서 룡정까지 걸어서 2시간 남짓이라는 정보를 들었으므로 그냥 걸어서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2시간 후 알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버스는 다니지 않았지만 고속도로에 택시와 개인 차, 화물 버스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모아산을 가로질러가면 되는데 나는 길치인지라 지도를 따라가다 보니 모아산을 빙 돌아가는 고속도로를 걷고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고 지도 상의 나는 거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낚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룡정까지 2시간 걸린다는 건 뛰어서 갔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내 걸음이 거북이걸음이 된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모아 산은커녕 모아산 등반 지점쯤 오는데 3시간이 걸렸다. 버스로는 한 정거장인데 지도 상 초록 모아산에 다가가려면 아직 멀었다. 한국에서의 버스 한 정거장과 중국에서의 버스 한 정거장은 급이 다른다. 낡은 역사에서 백팩에 챙겨 온 간식을 주섬주섬 먹었다. 고속도로 초입에서 공중 화장실을 다녀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을 줄 정말 몰랐다. 지도를 보니 룡정까지 가려면 지금까지 온 거리의 3배는 더 가야 하는데 그러면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어 있을 것이다. 버스는 없는 것 같고 택시라도 타서 어디든 가고 싶은데 택시가 정말 없다. 고속도로에서 택시를 딱 2대 보았는데 손을 흔들어도 보지 못하고 쌩쌩 지나간다. 화성으로 가다 중간에 멈춰 지구로도 화성으로도 오도 가도 못하는 우주 미아 신세가 된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나처럼 걸어 다니는 용자들이 간간히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자전거나 전동자전거를 탄 사람들도 보였다. 갑자기 서시장에 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1시간 반을 더 걸어서 모아산 공원에 도착했다. 건너편에서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모아산인 것 같다. 이상하게 용산이라고 적어 두었는데 지도상에는 모아산이 맞다. 엄청 큰 타워에 올라갈까 하다가 올라갈 힘이 없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고속도로는 더 이상 사절이고 인간이 다닐 수 있는 길을 걷고 싶었다. 내려가니 예쁜 석수들을 모아놓은 집도 있고 전원주택도 있었다.
전원주택 단지를 내려가면 작은 촌락이 보였다. 담장이 낮고 굴뚝이 있는 조선족 동포들이 모여 사는 동네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다들 한국말을 쓰고 있었다. 연길을 떠나니 더 한국말이 많이 들리다니 참 신기했지만 일단 걸었다. 택시를 잡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아니 그전에 좀 쉴 곳을 찾고 싶었다. 걸은 지 5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걷다 보니 왠 엄청 괜찮은 집 겸 카페가 보였다.
카페는 이 동네의 명소인지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엄청 북적이지는 않았지만 안팎으로 내가 앉고 싶은 자리는 대부분 동네 젊은 아낙들과 아이들 차지였다. 나는 라테와 초콜릿 쿠키를 주문해서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류의 카페는 한국에서도 좀 보았는데 이 정도 뷰와 정원을 지닌 곳은 흔치 않다. 그냥 한국에 가져다 놓아도 바로 명소가 될 것 같은 대박적 카페였다. 카페에서 좀 더 놀고 싶지만 그러다가 해가 지고 집에 못 돌아가고 내일 수업도 못 들어갈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서 커피만 마시고 나왔다. 다음에는 택시 타고 와서 3시간은 놀다 가야지 막 다짐하면서...
밖으로 나와서 차가 다닐만한 길을 찾았다. 밖에는 논이 있고 소들이 쉬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서 처음에는 소 모형인 줄 알았는데 정말 소였다. 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택시를 잡기 위해 걸었다. 논과 전봇대와 작은 집들이 있는 시골길을 정말 열심히 걷고 걷고 또 걸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시골집도 정겹고 좋았는데 너무 오래 걷다 보니 다 그 집이 그 집 같았다. 제발 택시 한 대만 나와라.
다행히 택시는 다니는지 딱 3대 보았는데 3번째 택시가 내 손을 보고 멈춰 주었다. 가보니 역시 손님이 있었다. 내가 연길시내 한 건물을 찍고 여기까지 태워 달라고 하자 룡정시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잡아 타라고 한다. 하하하 웃음만 나왔다. 거기까지 걸어가려면 온 만큼 더 가야 하는데 도착도 전에 나는 지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택시기사와 승객 모두 한국말이 통했고 내 빈약한(?) 다리로 거기까지 걸어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통사정하니 불쌍한지 그냥 얹혀서 같이 가기로 했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오니 20분 만에 집 근처에 도착했다. 6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오다니, 앞으로는 반드시 택시를 타고 가리라 다짐했다. 집에 도착하니 2시가 좀 안 되었는데 엄청 시간이 많이 간 것 같다. 좀 생각 없이 길을 나섰는데 그래도 짧은 여행을 잘 즐긴 것 같다. 다리를 잘 쉬고 다음에는 좀 가까운 곳부터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생했어. 즐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