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24일이 밝았다. 자금성이 오후에 예약되어 있어서 오전에는 만리장성에 가기 위해 오전 4시 반에 길을 나섰다. 만리장성은 내가 출발한 지린성에서 시작되어 선양이 있는 랴오닝성, 내몽골을 거쳐 도착지인 칭하이성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감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베이징에서 보는 만리장성은 그 일부이며 팔달령 장성이라 부른다. 베이징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덕성문 버스정류소에서 877번을 타는 것이다. 고덕 지도에 검색해보면 919번도 나오는데 그냥 지나치는 정류소이고 877번은 직통 버스로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1시간 만에 도착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깨끗하게 청소된 도로 위를 자전거를 타며 달린다. 어스름이 밝아오는 베이징 시내는 아름다웠다.
첫차는 항상 6시 30분이다. 버스 가격은 현금은 12원이고 알리페이나 위챗 페이로 결제하면 6원이다. 알리페이 Transport 메뉴에서 베이징 버스 카드를 미리 등록해놓고 오면 도움이 된다.
오전 시간이라 1시간도 안 되어 도착했다. 혹시 몰라 먹을 걸 잔뜩 싸왔는데 간식거리가 너무 많아서 민망했다. 베이징 시내에 비해 물가도 비싸지 않으니 와서 사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팔달령 장성을 올라보자. 팔달령 장성은 북쪽성길과 남쪽 성길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 북쪽으로 가길래 초행인 나도 따라서 북쪽으로 갔다.
덥다
8시만 되었는데 벌써 덥기 시작했다.
북쪽길 끝
한 30분 걸으면 북쪽 길의 끝이 나온다. 여기서 내려가면 케이블카 타기랑 더 북쪽으로 가기가 있다. 당연히 케이블카를 탔다.
만리장성 케이블카
케이블카는 편도 100원이고 왕복 180원 정도이다. 나는 다시 877을 타야 해서 그냥 돌아왔다.
내려가요
성벽 위는 나무가 없어서 9시만 되어도 프라이팬이다. 결국 성벽 아래 하산길로 내려왔다.
만리장성 터줏대감이 너냥
내려가는 길은 일반 산길이고 무척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나는 잘 몰라서 북쪽부터 보았는데 877 버스 출발시간인 10시 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니 남쪽 길부터 돌아보고 북쪽 길을 갔다 케이블카 타는 것을 추천한다.
하산
하산하고 10시 30분 877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도착하니 12시. 바로 자금성으로 향했다. 자금성 관람은 오전반 오후반이 있는데 오후가 더워서 그런지 전날보다 사람이 적었다. 하지만 더워서 죽을 것 같다. 우산을 챙겨 와 해를 가리는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자금성 대전
자금성은 생각보다 넓고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금색 유약을 바른 기와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돌도 반질반질하다. 내 평생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니 더워도 샅샅이 보고 가리라 다짐했다.
자금성에서 가장 큰 대전의 어도에는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 돌이 한 덩어리라고 한다. 이걸 가져오는 방법에 대해 수로를 만들어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귀여운 해태
각 궁 앞에는 꼭 해태 한 쌍이 있는데 우측은 항상 공을 굴리고 있고 좌측은 작은 동물을 밟고 있다. 얼핏 보면 아기 해태랑 놀아주는 엄마 해태 같기도 하다. 자금성뿐 아니라 베이징 내에는 정문에 저런 해태 한 쌍을 둔 은행이나 호텔이 많다.
궁 내부는 어두워서 잘 안 찍히는데 하나 건졌다. 엄청 화려하다.
이화원
북쪽으로 직진하면 북쪽 문 전에 왕들의 정원인 이화원이 나온다. 이건 작은 거고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호수를 낀 큰 이화원도 있다. 일단 맛보기로 보고 서궁으로 갔다.
서궁은 왕들의 후궁들이 주로 거쳐하는 곳인 것 같다. 곳곳에 후궁들의 암투와 서태후(자희태후)이야기가 나온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홍치제(명효종)이야기인데 만귀비 때문에 몰래 숨겨져 6살 때 비로소 아버지인 성화제를 만난다. 그 뒤로 어머니 기 씨와 내관 장민도 다 죽고 태후에 의해 키워져 왕위를 계승한다.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는 내가 찾아본 게 아니라 오디오 가이드 북에서 들려주었는데 이 가이드북 덕분에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자금성 투어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디오북
서궁 투어가 끝나고 동궁 투어를 갔다. 여기는 대체로 왕들의 휴식 공간이 있다.
동궁에 바로 들어가면 구룡벽이 있는데 그중 세 번째 백룡은 하단이 나무로 되어 있다. 이게 하나의 유리인데 만드는 과정에서 깨지거나 잘못되어 세공사들이 꾀를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흰 칠이 벗겨지긴 했지만 얼핏 보면 구별이 안 간다.
구룡 벽
전시
잠깐 전시도 들르고 경극 상영관도 보았다.
경극을 좋아하는 함풍제가 자희를 데리고 자주 왔다는데 자희는 그걸 싫어했다고 한다.
여긴 건륭제가 퇴임 후 유유자적하려 만든 방이라고 한다. 궁전 같지 않고 민간 사저 같은데 자세히 보면 전혀 민간스럽지가 않다. 저 돌 비석들도 건륭제 때 바쳐진 보물이며 꽃 하나도 돌을 깎아 세공한 것이다.
진비 우물
조금 돌다 보면 진비 우물이 있다. 당시 서태후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아들이 동치제가 죽자 방계인 광서제를 양자로 들여 수렴청정을 하였다. 광서제는 서태후를 싫어하고 변법자강 운동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광서제가 총애한 진비는 개혁을 더욱 부추겼는데 이 때문에 서태후에게 찍혀서 뺨도 맞고 우물에 던져졌다. 당시 진비의 나이 25세. 참 죄 많은 서태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진비와 서태후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위키에서 의화단 운동도 찾아보고 청나라 말기 푸이까지 읽으며 고궁을 거닐고 있자니 어느덧 4시 반. 나가라는 방송이 낭낭히 들린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빠져나가 한적한 자금성. 이제 사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