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마지막 장미
요즘 물감 정리에 푹 빠져서 시간을 막 쓰고 있다. 메인 팔레트만 구성을 세 번이나 바꾸었는데 세 번째 발색표를 만들고 보니 두 번째 것이 더 나은 것 같아서 그냥 두 번째 구성으로 정착했다. 정리하는 김에 반 고흐 팔레트도 요리조리 닦고 정리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색을 잘못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까맣게 몰랐는데 셀룰리안 블루와 프러시안 블루, 울트라 마린 딥 색상을 완전히 다르게 적어 놓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감 펜을 꺼내보니 펜에 색이름을 적지 않아서 구성하던 중 헷갈렸던 것 같다. 당시에는 색에 대한 감이 둔해서 다 비슷한 파란색으로 보였는데 요즘은 어느 색인지 감이 와서 알아챌 수 있었다. 어쩐지 강의들을 때마다 프러시안 블루로 파란 하늘을 칠하면 밤하늘이 되어서 이상했더랬다.(눈물)
본인은 채색을 참 못 하는 편인데, 그건 색에 대한 감각이 항상 부족해서였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 것이지 어린 시절에 그렸던 그림들은 대부분 흑백 만화라서 (그때는 ‘해칭’ 기법이나 ‘톤’ 같은 스티커지로 음영 정도만 표시했더랬다) 채색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근데 채색의 영역으로 와보니 일상의 색을 관찰하고 어떤 색인지 구별해 내는 능력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색을 단순히 빨주노초파남보로만 알던 사람에게는 같은 파란색에도 다양한 색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다. 게다가 사용하는 단어가 ‘파란색’ 하나라면 그 차이점을 인지하기 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물감을 여러 색을 자꾸만 부르고 사용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세 가지 파란색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SWC의 다양한 파란색들은 아직 구별하기 어렵다. 이것도 자주 사용하다 보면 구별할 날이 오겠지.
물감을 정리하는 김에 미젤로 미션 골드 팔레트를 꺼내보았다. 그동안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발색 테스트도 할 겸, 장미 그림을 그려보았다.
일단, 다른 대상의 장미를 그린 것이긴 한데 원본 사진의 색상은 다르지만 둘 다 퍼머넌트 로즈 색상에서 오페라 색상을 섞은 것이다. 자세히 보면 신한 쪽의 장미가 더 색감이 쨍하다. 신한 SWC의 오페라 색상이 쨍하기로 유명하다더니 역시나. 근데 녹색 계열에서는 확실히 미젤로 미션 골드가 과슈 수준으로 발색이 좋다. 둘 다 샙 그린을 메인으로 사용하였는데 신한 쪽은 좀 흐릿한 반면 미젤로는 그냥 원색으로 표현되는 느낌이다. 물론 물을 많이 묻히면 연하게 표현도 잘 된다.
수채화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흰색’ 부분인데 흰색은 어차피 덧칠이 불가능한 만큼 스케치할 때 미리 비워둘 곳을 계산해서 그곳을 비워두어야 한다. 근데 그게 어려워서 마스킹액도 사용해 보고 흰색 젤리롤로 나중에 덧그려보고 했는데, 결론은 그냥 비워두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성질이 급해서 마르기 전에 마스킹액 제거하다가 그림도 날리고… 수채화 하면서 비움과 기다림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근데 뭔가 연습할수록 점점 더 실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장미는 이쯤에서 끝내려 한다. 이제 장미 졸업하고 다른 보태니컬 아트를 연습해야지.
마지막으로 나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화단의 장미 아가씨들.
요즘 예쁘게 피어 주어 고마워. 다음 5월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