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k Display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특히 판타지나 무협 소설을 무척 좋아했는데, 학생이었던 시절 퇴마록과 드래곤 라자 등 걸출한 작품들이 막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지금도 웹소설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그 느린 전화선으로는 그림 하나 다운로드하기 어려웠던 시절,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화의 공유는 과히 폭발적이었다. 그때는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고 삐삐에서 벽돌 폰을 거쳐 카라나 스카이폰이 나오던 시절이었고 지금 같은 인터넷은 안 되는, 지금 생각하면 인터넷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웹소설들은 웹 상에서 읽히는 것보다 만화책방에서 빌려지는 게 훨씬 많았고 나도 그렇게 판타지 무협 소설을 열심히 봤더랬다. 엄마 몰래(…) 책 한 권씩 숨겨와서 감질나게 보는 재미는 참…. 원수 같았던 남자 형제 사람(오빠)도 이에 대해서는 대동 단결하여 같이 빌려 보고 돌려 보고 그랬다. 그런데 이 재미있는 소설들이 출판되는 속도보다 텍본(. txt)으로 인터넷 상에 뿌려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다음 권이 너무 궁금한데 출판사에서 찍어주기를 어떻게 기다릴 수가 있는가? 저작권, 그런 것에 대해서는 국가도 개인도 무지했던 시절 나는 간단히 텍본을 다운로드하고 새벽에 순찰 나오는 부모님을 대비해 어쩔 때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열심히 소설을 탐닉했었다.(그렇게 흑역사가 시작되고…) 하지만 컴퓨터가 있어야만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나는 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언제 어디서든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는데, 바로 전자사전에 내장된 텍스트 파일 읽기 기능이었다.
엄마는 내가 용돈을 아껴서 중고로 영어 사전을 사는 것을 보고 기특하다 생각하셨지만 여전히 영어 성적은 바닥을 깔아 주시고, 국어 성적도 그냥 그렇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오던 수학이 내 길이구나 생각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도 나도 참 바보 같았던 시절. 아무튼 이 작은 화면에 그 조악한 화질에도 녀석은 나에게 참 많은 공상의 세계를 보여주었었다. 영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한 샤프 전자사전 고마워!
인터넷에 텍스트 홍수를 이루던 시절 나와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았고,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줄 수 있는 기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전자 잉크의 자성을 이용하여 하나의 디스플레이에 수만 권의 텍스트를 보여줄 수 있는 디스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E-Ink 디스플레이 방식으로 속도가 느리고 특허권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일반 디스플레이와 달리 빛이 필요 없어 눈이 편하고 인쇄된 활자에 가장 가까운 방식이었다. 나 같은 이북 덕후에게는 매우 반가운 기술이지만 책 읽는 인구가 적은 한국에서는 딱히 환영받을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미국 아마존에서는 킨들이라는 이름으로 전자잉크 단말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아마존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아 한국에서 사기도 어려웠고, 한국의 책은 보기 어려워 소수의 진짜 덕후들 아니면 거의 볼 수 없었다. 한국도 느릿느릿 전자잉크 단말기를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괜찮았던 것이 바로 북큐브 815였다.
당시 교보문고 Sam도 나올 때였는데 나의 경우 대학교 전자책들을 빌려볼 단말기가 필요해서 북큐브를 선택했다. 와이파이로 쓱 다운로드하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컴퓨터에 연결해서 다운로드하는 귀찮은 방식이었고 화질도 조악한 편이었는데, 당시 나에게는 정말 신세계였다. 당시 대학교에서 전자책에 신경을 써서 다른 도서관들에 비해 전자책 권수도 많았고 종이책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책이 아닌 다른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 신기했다. 요즘 단말기처럼 화면을 터치할 수는 없었지만 단말기 자체도 튼튼하고 완성도가 있었으며 또각또각 물리 키나 넓은 화면으로 내가 원하는 책을 볼 수 있어서 당시 나에게 너무나 좋은 기기였다. 이걸로 책도 많이 보아서 연말에는 도서관에서 상도 주더라. (책도 읽고 상도 받고 1석2조)
전자책 단말기에 빠지면 결국 책을 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단말기를 사기 위해 책을 보게 되는데, 이 본말전도를 나는 꽤 오래 경험했었다. 중증인 분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애교 수준이긴 하지만…. 당시 북큐브, 샘과 함께 인터파크에서 야심 차게 비스킷(Biscuit)이라는 단말기를 출시했었다. 뭔가 킨들 아류작 느낌이 나는 건 느낌적 느낌이고, 녀석은 TTS까지 되고 책을 사볼 수도 있어서 나도 중고로 하나 구매했다.
광고에서 보면 진짜 편리하고 예쁘긴 한데, 생각보다 단점들이 많다. 일단 너무 무거웠다. 스펙 상의 무게도 있지만 전용 케이스도 엄청나게 무거워서 이동 시에 보기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키보드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외관 상으로 좋을지 몰라도 실제 타이핑이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이 물리 키보드 방식이 킨들에서도 채택했었는데 생각보다 진짜 이용을 하지 않아서 사라졌던 방식이다. 차라리 키보드 없는 북큐브가 가볍고 편리했다. 하지만 TTS 기능도 꽤 유용했고 txt 말고도 꽤 여러 확장명의 파일들을 지원하며 신간 도서를 사서 볼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이것도 꽤 사용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디자인이 예뻐서 들고 있으면 뭔가 읽을 맛이 났던? 한 동안 인터파크에서 신간을 사다 보는 재미도 있어서 유용하게 사용했었다.
하지만 역시 책 읽기 어려운 나라 한국이었던가? 인터파크에서 전자책 사업 철수 결정을 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 팔게 되었다. 뭐, 교보문고도 두 손 두 발 다 들은 전자책 시장인지라 혼자만 욕 들을 일은 아니지만 대기업에서 너무 무책임한 결정이 아닌가 싶었다. 나의 경우 전자책을 사보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더 많아서 타격이 크지 않았지만 인터파크에서 도서를 사서 보았던 많은 고객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게다가 단말기 지원이 끊겨서 컴퓨터용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부터 물리적 AS까지 모든 것을 소비자가 떠안아야 했고, 그 때문에 당시 전자책 커뮤니티에서는 인터파크 탈퇴나 격한 논쟁에 오갔던 것 같다. 온라인 상으로 익명의 사용자들과 논의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낸 결론은, 책 팔기도 어려운 한국 시장에서 전자책 단말기를 내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이며 앞으로 전자책은 스마트폰 용으로만 보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도 당시 사건으로 깨닫는 바가 많아서 앞으로 전자책 단말기를 내는 회사가 있으면 거르고 콘텐츠 중심으로 소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2세대부터는 다음으로 넘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