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추억2/Wangen의 겨울
가스트호프 존넨할데/해뜨는 언덕
한때의 가난이나 어려움은 잊기는 쉽고, 기억하기는 아름다운 것인듯하다. 그리고 기억을 하자니, 극히 사소한것도 내게는 소중했다고 쏟아져나오기도ᆢ
우리의 첫 방 '해뜨는 언덕'은 주인이 머물던 식당이 있는 건물과 이삼층쯤의 여관이 마주보고 있었다.
장기투숙자였던 우리방은 여관1층 현관으로부터 제일 떨어진 맨 마지막방이었는데
그 작은 시골여관에 누가 머물겠나싶게 늘 정적이던 여관에서 나는 남편이 출근한 시간내내 어쩌면 이 낯설고 적막한 건물에 나홀로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부지런한 독일인들답게 아침일찍 일과가 시작됐던 연구소에 가려면
남편은 새벽동이 트기도전에 방문을 나서야했고
나는 매일새벽 남편이 현관에 닿도록까지
방문에 기대서서
깜깜한 여관복도에 우리방의 불빛을 내주는것으로 남편을 배웅했다.
그리곤 단단히 잠근 방문을 확인하며 성에가 쌓인 창으로 어둠속에 보이지도않는 남편의 뒷모습을 쫓았는데
가끔은 남편이 일부러 우리방 창밖에 와 똑똑 두들겨,
성에를 닦으며 다시 작별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안나 까레니나같은
옛 러시아명화 속 기차역에서 얼어붙은 창을 사이로 '더스비 다니아' 작별인사를 나누던 연인들처럼
조금은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오후가 되면 만날 거라도
안녕이란 인사 외엔 독어라곤 몰라
벙어리 귀머거리에 장님으로 대책없이 여관방에 남겨지는 만 스물셋 신부와
장학생에 선발된 것이 무슨 대수라고 덜컥 결혼해 아내 혹을 붙이고 유학와
미끄럽고 깜깜한 새벽눈밭을 몇십분씩 걸어내려가야했던 또 스물셋 남편에겐
짪은이별도 매번 서로를 생각하며 안타까웠다.
욕실이 딸린 우리방엔
창가에 붙은 작은 테이블과 의자, 침대와 붙박이장속의 이민가방이 전부라
요리도 살림도 할게 없던 나의 일과는 매일이 무력하고 무용했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책도 텔레비젼도 라디오도 없어 종일 낙서나부랑이와 편지를 쓰거나 김이 가득서린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꽃과 새를 그리고ᆢ
그것도 지칠때쯤은 까무룩 낮잠을 자거나 수많은 공상에 빠지곤했다.
부엌이 딸린 지극히 작은 방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게없을 때였음에도
무대를 독일로 옮겨선지 공상속에서 우리는 유럽귀족영화에서처럼 천장이 높고
12인용쯤의 길고긴 식탁이 있는 집에서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식사를 했는데ᆢ 상상속에서도 밥과 식당외의 방으론
지평을 넓히지않았으니 내 청춘은 여전히 소박했고 그래서 더 싱싱했다.
그 긴 시간을 동네밖을 좀 걸어도 좋았으련만 ᆢ
밖에 나가봐야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갈곳도 없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낮에도 컴컴한 그 여관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가는데에 두려움을 갖고있었다.
복도에 나란히 이어진 방문들 속이 텅 비어있을까 의심스러운 한편, 갑자기 방문이 덜컥 열리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다.
그러니 남편이 없을땐 독거실,
남편이 오면 2인혼거실 감옥속에 갇힌듯ᆢ
남편이 없을땐 말할 사람이 없고
남편이 있을땐 독어문장을 통째로 외워대던 남편에게 방해가 될까 입을 다물어ᆢ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말없이 무료한 겨울을 지내다
밥을 몰래 해먹게된것도 어쩌면 심심함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퍼로 높이가 늘어나던 진초록이민가방속엔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과 고추장이 있었다.
어느날 밥을 하고 고추장에 소세지를 찍어먹은 것을 시작으로, 대담하게 양파와 감자를 사
흡족히 고추장찌개를 해먹은 뒤
남편은 연구소에서 강의를 듣던중
평소엔 얼굴도 볼수없던 높은 사람에게 불려가 여관에서 밥을 해먹었냐는 문초를 받았다. 그러면 비자가 취소된다는 경고와 함께ᆢ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이 썩고있어
냄새가 난다고 얼버무려 위기를 넘겼지만
휴지에 싸서버렸던 야채껍질이 문제가 되었던지,
냄새가 원인이었던지도 모른채
그 일로 여관주인도 아닌 연구소높은사람에게 혼난 것은 우리에게 반성에 앞서 충격이었다.
며칠에 한번씩 수건을 갈아주러 청소아줌마가 들리면 늘 어설픈 인사와 함께 웃음을 보냈는데ᆢ 어느새 그녀가 우리의 비리를 여관주인에게 이르고 다시 연구소에 고해바쳤단 말을 들으니 유태인을 고발하던 독일을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여관에서도 팁을 주었어야했던가 생각했지만
미리 깨달았다해도 매번 팁을 지불할 여유가 없었을 우리는, 독일정부가 자기나라보다 후진국에게 주는 '제삼국장학금'이란 이상한이름의 장학생 부부였다
그렇게ᆢ나의 요리생활은
몇일만에 끝나버리고
우리는 해뜨는 언덕을 떠나기로 했다.
사실 그 결정을 내리는데엔 용단이 필요했다.
독일정부에선 매달 950마르크의 장학금을 주었는데, 당시환율로 삼십만원쯤의 돈은
보통 독일학생부부의 집세가 삼사백마르크 정도였으니 박한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국립유가공연구소가 있던 방엔은 너무 작은마을이라 빈방이 없었고ᆢ 겨우 찾은 '할라하'씨 집의 부엌딸린 삼층다락방은 홀리데이용 숙소로 세를 놓던곳이라 방세가 비쌌기때문이다.
여관청소부아줌마에 대한 반감과 민망함으로ᆢ
두달째 금지돼 더 절박해진 쌀밥에 대한 허기로ᆢ
어느날 창가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올려놓았던
여관방을 나온대신
우리는 매달 750마르크를 방세로 지불해야했다.
교통비를 아끼기위해
해뜨는언덕에서 할라하씨 집까지ᆢ
처음 '방엔' 땅에 발을 디딘 기차역을 중심으로
동쪽 끝과 서쪽 끝으로 떨어진 거리를 꽤 오래
이민가방을 끌고가
첫방세를 선불했을때ᆢ어쩌다 가끔 하루이틀씩만 방을 빌려줘봤을 순박한 할라하씨 온가족이 'Good Luck'이라며 목돈을 돌려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방이 생겼다는 기쁨과 함께
장학금 중 방세를 뺀 2백마르크, 달랑 육만육천원으로 살아내야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독일에서 한 진짜 훌륭한 공부는
남편의 '유가공마이스터'공부보다
작은 돈으로 잘 살아내던 것일수도ᆢ
단한번도 넉넉치않았지만
결코, 쓰거나 꿈꾸기에 모자라지않던 돈으로
모든 걸 했던 얘기는 이어서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