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추억4/ Wangen의 동양인
아버지 아버지
알고이지방엔 사육제가 열렸다. 축제기간엔 가장행렬이 마을과 마을을 돌았고 작은 시골 광장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행렬떼가 방엔을 지나던 날,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우리였다. 주변사람들은 물론, 멋지게 탈을 쓰고 행진하던 몇몇까지 퍼레이드를 이탈해, 구경중이던 우리와 한번 껴안거나 사진을 찍고싶어했다.
우리는 '방엔'에 입주한 첫 동양인이었고
동양인얼굴은 어떤 탈바가지보다도 그들에게 신기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아버지가 방엔에 오시는것도 모두 알았을것이다. 우리 이전엔 그 마을을 지나간 동양인도 없었다니 우린 몰라도 마을사람들은 우리존재를 알았고, 동양인의 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도 모두에게 퍼져,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을지도ᆢ
아버지의 도착을 가장 반긴 것은 동네고양이였다.
영국출장 뒤 내게 들리는 아버지가방속에, 엄마가 아버지도 몰래 굴비한두름을 넣어보내서였다.
평소의 깔끔하고도 칼같은 아버지 성품같으면 이미 런던의 호텔에서 속옷에 잔뜩 냄새를 묻힌 굴비를 보자마자 패대기를 치셨을텐데ᆢ
그런 아버지도 엄마가 막내딸에게 보내는 한국음식만은 어쩌지못해 그대로 가져오신 굴비는
오래 가방속에 싸여있어 눅눅했고
좀더 말리려 다락방 창옆에 매달았더니 동네고양이란 고양이는 전부 우리지붕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렵게 들리신 딸네집에서 물갈이로 사흘간 설사만 하셨다.
독일물은 끓이면 주전자에 하얗게 광석이 돋을 정도로 석회수였다. 독일사람들도 식수로는 생수나 정수만 사용하는데, 가난하고도 태평했던 우리는 젊음을 무기로 그냥 물을 끓여 커피필터에 내려먹었다.
뒤늦게 준비한 생수와 지사제로 속을 달래며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동네 최고의 식당에서 요리도 사주시고 우린 아버지돈으로 호기롭게 5마르크씩 팁도 주었다. 5마르크면 내가 여덢번씩 나누어먹던 싸구려 갈은고기도 몇팩을 살수있는ᆢ우리에겐 큰돈이었지만 뭔가 말설고 낯설은 그곳에서 돈도없어 납작 엎드려있던 자존심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아버지의 귀국전날엔 츄리히 공항부근 호텔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방과 우리방을 사이에 두고 작은거실이 있던 방이었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아버지와 헤어질 시간이 가까와오는게 슬퍼 영 잠을 못이루고ᆢ뒤척이고 뒤척이다 틀어본 TV에서 생전 처음보는 야하고 시끄러운 영화를 해
깜짝놀라 끄며 잠도 깨고 슬픔도 깼던 기억이 난다.
몇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방에는 근 오십년간 한 회사에서 일하신 아버지의 근속상패와 기념패, 골프우승트로피들이 있다. 그리고 그옆엔 그옛날 우리동네 슈바르츠발트를 나와 산책하다 주워오신 마른 솔방울이 놓여있다.
육십이면 마치 수를 다한듯 환갑잔치도 하던 시절, 이제 헤어짐 또 언제보나, 출국길마다 눈물로 헤어지던 시절, 겨우 한달에 한번쯤 우리가 주먹가득 동전을 그러쥐고 공중전화기에 매달려야 끊어질듯 저멀리 들려오는 딸의 소식을 듣던 시절,
공항에서 딸과 헤어져본 뒤에야
그저 슬픈게 아닌 정말 명치끝이 아프도록 가슴아픈게 뭔지아셨다는 아버지가,
딸대신 안고간 솔방울이 여전히 아버지 방에 있는데 이젠 아버지가 멀리 계신다. 너무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