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 23일, 나의 한 해가 시작된다.

2024년 3월 23일, 한화 vs LG 잠실야구장 직관

by 김원

학창 시절 소풍 전 날 밤엔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친구들과 매일 가던 학교를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간다는 설렘으로 가득 찼던 밤이 생생하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옷을 엄선해 꺼내놓고 방방 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행복이 파란색이라면 내 머릿속은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쨍쨍한 여름날의 하늘이었다.


이제 20대 후반이 된 나의 머릿속도 매년 한 번씩은 푸르고 쨍쨍하다. 바로 프로야구 개막 하루 전 날 밤이 그렇다. 올해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행복과 기대를 안고 잠에 겨우 들었다.



나는 한화이글스의 팬이다. 올해는 메이저리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이 개막전에서 복귀한다. 류현진 선수의 복귀가 기정사실화된 2월쯤부터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작년 우승팀인 LG를 상대로 만년 하위팀인 우리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까? 기대는 부풀어 터지기 직전인 풍선 같았다.



개막 전날 밤,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내일 입고 갈 선수의 유니폼도 골랐다. 올해 주장을 맡은 채은성 선수의 유니폼이다. 한 해동안 잘 부탁드린다는 나만의 주술이다. 야구 직관가방도 야무지게 챙겼다. 주황색 응원배트 한 쌍, 물을 담아 마실 텀블러, 물티슈, 혹시 선수를 마주칠 가능성에 대비한 유성매직과 야구공 하나.


개막 디데이, 아침이 밝았다. 평소였으면 조금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오래 들여다봤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겨울 내내 손꼽아 기다리던 날, 가장 먼저 한화이글스 팬카페에 들어가 함께 들뜬 사람들의 글을 확인했다.


[지하철 첫 차 타고 갑니다!!!]

[잠실 야구장 음식 추천해 주세요]

[방금 취소표 잡아서 개막전 갑니다 ㅠㅠ]

[온 가족 출동~!!]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글을 읽을 여유는 없다. 나도 야구장에 3시간 전에 도착해 티켓을 발권하고, 일치감치 입장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잠실야구장은 입장줄이 밀리면 1회 초 시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잦다. 원정팀인 우리가 1회 초 공격을 하기 때문에, 늦게 입장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인업송을 함께 부르지 못한다!


서둘렀다. 아침 샤워를 하고 날씨를 체크했다. 최고 기온 18도,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패딩을 입었지만 18도에 패딩은 무리인 것 같다. 노시환 선수의 30 홈런 기념 티셔츠에 폭닥한 기모맨투맨 하나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치즈김밥 한 줄을 포장하고 편의점에서 홈런볼을 하나 샀다. 이제 잠실야구장으로 향하는 2호선을 타러 출발한다.



가는 길부터 기운이 좋았다. 이글스 유니폼을 리폼한 짐쌕 배낭을 멘 내 또래 여자 두 분이 함께 2호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함께 걸었다. 나도 유니폼을 입고 출발할 걸 그랬나, 하지만 아직은 부끄럽다. 유니폼은 직관 가방에 고이 접어 넣어두고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했다. 5번 출구의 설명은 간략하다. '야구장', 딱 세 글자다. 하지만 그 세 글자가 날 매번 설레게 한다.


지하철에서부터 엘지 트윈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 더운 날씨에 작년 우승을 기념하는 재킷과 가을야구를 상징하는 유광잠바를 번쩍번쩍 빛내는 팬이 정말 많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부러웠지만, 올해는 너희가 우리를 부러워할 것이다는 마음으로 티켓을 발권했다. 드디어 몇 개월간 출입을 금지(?)당했던 야구장으로 입장하는 순간.



뻥 뚫린 하늘과 광활한 야구장 그리고 그를 메운 설레는 사람들. 야구장은 불확실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야구의 묘미는 변수라고 한다. 기대도 않던 선수의 활약에 모두가 환호하고 그의 이름을 외쳐주는 공간, 야구장의 매력이다.


그런데 이 매력이 항상 우리에게만 통한다는 법칙도 없다. 오늘 이 변수가 류현진 선수가 될 거라는 생각을, 작년 한화 팬의 사랑을 듬뿍 받던 전력질주 문현빈 선수가 될 거라는 생각을 그 누구도 못 했을 것 같다. 적어도 난 못 했다.


역대급 성량으로 잠실을 울리는 라인업송을 부르고, 1회 초 공격이 다소 아쉽게 끝났다. 하지만 괜찮다. 선발투수 류현진이라니, 우리의 수비 차례였지만 공격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다. 1회 초, 류현진 선수는 막강한 엘지 트윈스의 상위타선을 잠재웠다. 아, 이제 우리도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투수가 생겼구나. 감격에 겨웠다.


그런데 류현진 선수의 제구가 잡히지 않았다. 직관으로는 스트라이크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내가 봐도 공이 많이 날리고 있었다. 사실 몇 개는 못 본 척했다. 잠시 갖는 조정 시간일 거야... 적응하는 중일 거야... 하지만 볼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자 내 마음속 느낌표는 물음표로, 하늘을 찌르던 직선은 서서히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범경기 후반에 보여주던 불타는 공격력도 찾을 수 없었다. 내야 땅볼과 뜬 공의 향연이다. 게다가 볼을 많이 보고 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승부는 3구 이내에 났던 것 같다. 선수들은 응원가가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수리야, 올해는 다르다며.


자신감 있던 모습은 다 어디 간 거지? 올해 슬로건이 분명 Different Us였다. 올해는 다르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익숙한 경기를 보고 있는 거지 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지난 몇 달의 기대와 몇 주간의 초흥분상태가 단 1시간 안에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비행기도 이렇게 급하게 고도를 낮추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내 마음은 그걸 강제로 해내야 했다. 4회 중간, 문현빈 선수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팀이 무너졌고 류현진 선수는 마운드를 내려왔다.


응원석 주위의 분위기는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순식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분위기는 싸늘을 넘어 정적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인지가 힘들었다.


이건 어디서 익숙한 장면이다. 딱 1년 전, 작년 개막전에서도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외인투수 버치 스미스 선수가 3회쯤 불편을 호소하며 마운드를 자진해서 내려왔었다. 그리고 이태양이 급한 불을 끄러 등판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급한 불을 끄러 온 이태양을 보았다.


데자뷔 같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선수들도 믿기 힘들었는지 맥없는 공격이 경기 후반까지 지속됐다. 홍창화 응원단장님은 못 틀어본 노래가 많다고 경기 후반 응원가 메들리를 시작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응원가나 부르자. 노래방 모드가 시작됐다. 익숙하다. 경기 흐름이 넘어가 버린 후반이면 종종 이렇게 한다.


경기 종료. 8대 2라는 스코어로 한화 이글스의 패배. 그 어느 패배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패배에 큰 타격이 없던 난 한화 이글스의 팬인데... 수백 번의 패배를 봐왔지만 오늘 패배는 달랐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게 인지부조화인가? 건너편의 엘지 트윈스가 미웠다. 사실 많이 부러웠다.


경기 직후 인스타 스토리. 참을 수 없었다.


근처 냉면 맛집에서 속을 식히러 냉면 한 그릇을 했지만 잔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잔뜩 지쳐 집에 와서는 야구 유튜브를 몇 편 봤다. 한화 이글스의 공식 인스타그램은 올해부터 패배한 경기도 스코어 피드를 올리기로 했나 보다. 개막 후 첫 피드는 안타깝게도 패배 스코어다. 가장 많은 하트를 받은 댓글이 이거다.


[내일이 벌써 개막이라니 설렌다]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마음가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래 원래 우리의 1 선발은 페냐였으니까, 류현진 경기는 없다 치고 내일부터 개막전이다.


내일도 야구장으로 향해보자. 또 속아보자. 이길 돌파구가 보이지 않지만, 갑자기 내일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도 몰라.


나의 2024년은 내일 시작된다. 진짜 내일 시작이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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