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두 번째로 읽었다. 첫 번째로 읽은 건 아마 대학을 졸업한 스물 다섯 즈음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눈물을 흘릴 만큼 인상 깊은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굳이 중고 서점에 되팔지 않았다. 미래의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 할 것 같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있었다. 모순은 두 번의 이사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나는 이십 대 후반 사랑과 삶에 대한 고민으로 스물네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이 책의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익숙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1.
본능적인 매력을 느끼는 불안정한 남자와 순하고 착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시대를 불문한 여성들의 숙제이자 고민인가 보다. 그리고 대다수의 여성들은 엄마가 살아온 평범한 인생을 거부하며 특별한 이성을 내 운명이라 쉽게 여기곤 한다. 그 오해와 욕망에서 평범한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청춘은 아직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젊음의 선택은 그 선택이 무엇이든 아름답다.
20대 초반을 지나 사회에 자리를 잡고 책임이 늘어날수록 평범한 인생은 기피의 대상에서 부끄러운 소망이 된다. 아마 그 소망을 받아들이는 건, 나의 인생을 건 선택들이 사실 별 대수롭지 않은 갈림길일 뿐이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을 때. 진짜 인생을 건 선택은 지금 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검은 쓰나미처럼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2.
진진은 단단하다. 나영규와 김장우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건 진진의 잔가지와 잎일 뿐이다.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무엇이 결핍된 인간인지 끈질기게 파고들 줄 아는 근력은 진진의 뿌리에 굳게 심어져 있다. 진진보다 어린 나이에 이 책을 읽었을 땐 진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진진보다 많은 나이에 이 책을 다시 읽은 지금은 진진이 이제야 내 또래 같다.
가만 보면 진진은 그녀의 엄마를 닮았다. 진진의 엄마는 시련의 파도가 닥칠 때마다 책을 사 읽는다. 인생의 난이도를 하드모드로 높이는 퀘스트가 등장할 때마다 어떤 아이템을 써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의 단단한 탄력이 진진의 엄마에겐 있다. 그 면에서 진진은 엄마를 닮았다.
3.
평생 청춘을 살고 싶다.
한 치 앞을 모르고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흔들리기도 하며 생각을 바꾸는 우유부단함을 놓지 않고 싶다. 이성적인 남의 충고보다 두근거림과 같은 신체적 증상에 기대는 연약함을 남겨두고 싶다.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힘을 믿지 못하고 얄밉게 곧게 뻗은 시침과 분침 위에 주저앉아 버리는 날도 종종 있었으면 한다. 시간이 흘러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바지의 흙을 훌훌 털고 멋쩍게 일어나 정든 오랜 친구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불러내고 싶다. 어제보다 단단해진 나를 마음 한 켠으로 미워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여전히 사랑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