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은 하남자다. 대뜸 다른 남자랑 잘 만나고 있는 동네 미녀를 탐내질 않나. 피 팔아다 얻은 돈으로 무작정 결혼하겠다 우기질 않나. 아내의 외도(외도라고 하기도 애매하다)로 인한 열등감을 핑계로 다른 집 아내를 범하질 않나. 셋째한테 저리 가라 첫째한테 저리 가라... 책임감 없는 육아방식까지.
그럼에도 술술 넘어가는 책장을 멈출 수 없던 건 ‘허삼관 이 사람 어떻게 되나 보자.‘ 하는 본능적인 호기심이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허삼관의 모습이 흔하다. 흔한 한국 사회의 아버지를 닮기도 했고, 나를 닮기도 했다. 허삼관의 꼴이 그렇게 우습고 한심해도, 그의 미래가 궁금한 이유다. 저렇게 피를 팔아서 죽어버릴지 살아버릴지...
허삼관은 인생의 고비를 피를 팔며 넘긴다. 피는 소설 속에서 곧 본인을 살아있게 하는 힘과 젊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젊음을 태우며 하루하루 고단하게 사는 인생에게도, 과거의 젊음을 다 퍼다 써버린 인생에게도 쉽게 닿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내놓곤 한다. 가령 긴 수험생활을 위해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의 몇 년을 바친다.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회사 비위 맞추는 데 진정한 꿈과 시간, 건강을 태우기도 한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내놓지 않으면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허삼관도 마찬가지로 본인을 살아가게 하는 피를 내놓지 않았으면 결혼도, 집도, 소중한 가족의 생명도 지키질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피 팔아서 뭘 지켰냐, 하면 저 셋을 말할 수 있는 삶이라니. 어라, 나쁘지 않을지도. 앞에서는 허삼관이 하남자라며 잔뜩 비난해 놓고 문득 부러워진다. 난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고, 소중한 가족을 살려본 적도 없어서 말이다. 크흠...
피를 팔아도 영화 티켓 밖에 못 얻는 지금, 나는 무엇을 팔며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