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르막길

2024년 3월 26일, 한화 vs SSG

by 김원


산을 오르다 보면 가끔 숨을 고를 수 있는 평지나 내리막길이 있다. 잠깐의 내리막이지만 결국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에 모두 그 내리막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본 한화이글스 투수 중 가장 마음이 쓰이는 선수 중 하나는 바로 김민우 선수다. 경기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마운드에 올라 어찌나 그렇게 생각이 많아 보이는지. 선발투수가 김민우 선수인 날은 항상 잠에 들곤 일쑤였다. 경기가 지루한 것은 절대 아니고, 투구 인터벌이 긴 선수라서 그렇다. 마운드 위에서 푹, 숨을 한 번 쉬고. 자세를 고르고. 타자를 한 번 쳐다봤다가, 정면 한 번 보고. 공을 매만지고. 매만지고. 생각하고. 포수 사인을 확인하고. 또 정면 보고. 드디어 던진다. 볼. 결국 볼넷. 주자는 1루로 나간다.


사실 그가 등판한 경기는 평소 야구를 보느라 미뤄왔던 운동을 가기도 했었다. 워낙 경기가 루즈해지니 운동을 실컷 다녀와도 경기를 중반부터는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운동하고 샤워하고 나와도 그는 한창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을 던지고 있었다.


MBTI가 INFP라던데, 온몸으로 본인이 인프피라는 걸 티를 내는 선수였다. 인프피 친구한테 이 얘기를 해줬더니 뭐라고 하지 말란다. 인프피가 투수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아무튼. 김민우 선수가 선발투수로 나오는 날은 그렇게 좋은 날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내가 앞서 말했듯이, 가장 마음이 쓰이는 선수다. 국내 토종 선발이라고 수베로 감독 아래에선 개막전 1 선발도 맡아줬으며, 팀이 어려웠던 시기(몇 년째 어렵지만...) 힘들게 꾸역꾸역 10승을 이뤄내 줬던 선수다. 집안이 어려울 때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자식을 보는 기분이랄까. 뭐 그렇다.


그런 김민우 선수가 작년 2023년에는 초반 좋지 않은 페이스와 더불어 부상으로 시즌을 일찍 마무리했다. 그리고 겨울에 들려온 소식. 김민우가 반쪽이 됐다는 소식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구단 유튜브를 보니 믿을 수 없었다. 작년까지는 먹이를 배불리 포식한 곰 한 마리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 멸종 위기를 겪은 북극곰처럼 보였다. 목과 이어지던 턱선이 제 그림자를 찾았다. 몸도 굉장히 다부져진 모습이었다. 선수의 의지가 몸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 한화팬은 또 속아보기 시작했다. 이번엔 너조차 다른 거야?


기대에 부응한 김민우 투수는 늦은 투구 인터벌을 고쳐냈다. 시범경기에서는 저기 서있는 우리 팀 투수가 김민우 투수가 정말 맞나 싶은 정도로 180도 변한 모습이었다. 마운드에서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던지는 듯이 손에 공이 들어오는 즉시 사인을 받고 던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그 김민우가 맞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나쁜 뜻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칭찬 중 가장 최상급의 칭찬이다.


드디어 SSG와의 첫 주중 시리즈. 김민우가 상대 외국인 투수 더거를 상대로 선발로 등판하는 날이었다. 마침 오늘 나는 수영장에 가는 날이었다. 8시에 수영이 끝나고 몇 회가 되어있는지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수영 강습이 끝나고 설레는 마음으로 스코어를 확인했다. 5회 초, 4:0으로 한화이글스의 리드. 헐. 0 실점? 이게 실화야? 김민우 선수 정말 부활한 건가? 김민우 선수에게 쏟았던 기대를 다시 해도 되는 걸까?


사실 투구 내용이 완벽하진 않았다. 고질병인 볼넷이 세 개 정도 나왔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위기 상황마다 실점하지 않고 침착하게 넘겨내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도 끝을 장담할 수 없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결국 선발투수로 성공적으로 복귀한 김민우 선수에게 오늘 나의 모든 박수를 보낸다.


2024년 한화팬에게 문동주가 있다면, 10년 전 한화팬에겐 김민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선수는 잠깐의 내리막을 묵묵히 걸어내고, 결국 오르막을 걷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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