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궁궐과 곤룡포가 떠오른다. 그 뒤를 힘없는 꼬리처럼 따르는 하인들과 멋없이 거친 서민들의 모습도 곁다리로 떠오른다. 조선 시대극의 중심에 권력이 아닌 소외된 자를 두었을 때 사극의 매력이 배가 된다는 것을 자산어보를 보고 알았다. 그러고 보니 역사를 배우며 가장 재미있던 건 왕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외우던 순간도 아니고, 이름만 달라지고 계속 반복되는 정파 싸움의 구도를 외울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역사서에서 정면으로 빛을 비추지 않았던 인물과 사건의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때 귀가 활짝 열리지 않았던가.
흑산도로 유배를 온 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정약전,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학자 정약용이 주인공이 아닌 점에서 감독의 화려한 드리프트 기술을 목격한 기분이다. 정약전은 신유박해로 사학죄인이라는 죄목을 쓰고 중앙 정치와 참 멀리도 떨어진 흑산도로 유배된다.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서민들이 그 섬의 생명력을 꿈틀거리게 하고 있었지만,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죽은 자와 갓 태어난 아이를 가리지 않고 세금을 매기는 정책 아래 고난스러운 때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꿈을 꾸는 사람은 계속 꿈을 꾼다. 흑산도의 어부 창대는 천자문과 소학을 모두 읽은 보기 드문 어부다. 학문에 대한 갈망으로 새 책이 섬으로 들어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새로운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흥분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청년이다. 마침 흑산도로 유배온 정약전이 곧바로 창대의 스승이 되어 둘이 학문의 티키타카를 주고받을 것 같지만 이는 순진무구한 오산이다. 창대는 정약전을 사학죄인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진다. 창대가 읽은 유교 서적들에 의하면 정약전은 사학(천주교)을 믿고 따르는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약전은 본인을 향해 절대적인 반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창대를 보고 한마디 내뱉는다.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
흑산도 유배 생활에 고뇌를 거듭하던 정약전은 어느 날 밤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를 멀리서 보고 있던 창대가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되고, 그들은 제대로 대화할 기회를 얻는다. 창대는 학문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학문의 끝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믿는 유형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를 겪고 그 풍파로 흑산도까지 오게 된 정약전은 창대를 쓸쓸한 눈길로 바라본다.
여기서 나의 입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생 시절 무슨 과를 다니냐는 어른들의 질문에 "정치외교학과요."라고 말하면 모두 참 멋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들이 자동적으로 내뱉은 감탄사는 내가 아닌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십수 년 세월을 살아도 알 수 없는 정치에 대해 배운다니 그랬으려나. 하지만 고백하건대 정치학을 배운 나도 지금 저들이 왜 저러는지 잘 모른다. 어쨌든, 내가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한 이유는 가장 흔한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며, '성적에 맞춰서'도 아니며, '이름이 멋있어서'도 아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인가 고민하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론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창대처럼 학문의 끝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힘의 이동과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국제정치이론, 인간에 대한 탐구가 여실히 녹아있는 정치학 이론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대학교 첫 수업, 정치학개론 첫 시간을 앞둔 연분홍색 코트를 입은 내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내가 공부만 잘하면 거대한 세상을 조그만 내 손바닥에 두고 이리저리 굴려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당연히 착각이었다. 학문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더 낫게 바꿀 순 없었다. 아마 대학교 3학년을 지날 때쯤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의 무용함과 허무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더 배우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게 타들어갔다. 내 열정은 찬물을 끼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장작이 모두 타버릴 때까지만 기다리면 알아서 꺼지는 힘없는 불꽃이었다.
정약전은 말한다. "사람이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이놈(창대)이 물고기에 대해 알아낸 것만큼도 알지 못했다.",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를 해볼 생각이네. 사물로 나를 잊어볼 생각이네."
창대와 정약전은 거래를 한다. 창대는 정약전에게 물고기 지식을, 정약전은 창대에게 <대학>을 읽고 가르쳐준다. 드디어 관객이 원했던 관계가 성립된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세월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르침을 아낌없이 나눈다. 세상과 친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 학문에 갇힌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언제나 배움과 경험, 교훈의 타이밍이 제시간에 맞아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창대는 학문이라는 날개를 달고 출세라는 하늘로 날고 싶었고, 정약전은 이에 반대한다. 이 둘은 갈등을 풀지 못했고, 창대는 결국 출세해 흑산도를 떠난다. 하지만 머지않아 관리들의 부패한 모습에 혼란을 겪는다. 그가 공부해 온 책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관리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리라. 현실은 책과 달랐다. 그 사이 정약전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결국 창대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를 너그러이 안아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학문의 끝이 손 닿을 수 없는 하늘이 아닌, 바로 무릎을 꿇어 만질 수 있는 땅을 향해 있었으면 한다. 내가 배운 학문이 화살이라면, 활을 쏘는 궁수(나)의 실력이 부족하여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로 힘없이 쏴버렸다. 정약전의 가르침대로 학문은 세상과 닿아있어야 한다. 마치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지만 결국 땅에 발을 딛는 새처럼 말이다. 그래야만 하늘 위 저 밝게 빛나는 별은 모르는, 바닷속 물고기들도 볼 수 있는 법이다. <자산어보>는 내가 본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중 가장 훌륭한 영화였다. 학문의 방향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 젊은 창대와 노쇠한 정약전의 화합과 대립. 영화는 내내 흑백 화면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꼭 글을 쓸 때 필요한 먹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