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다녀온 로테이션 소개팅 후기
올해 크리스마스였다. 남자친구 없이 지낸 지도 벌써 네 달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잘 회복하고 나의 시간을 잘 가지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다음 관계로 마음이 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펼치고 있는 이 책의 양 페이지를 다 읽고 이해했으니, 한 페이지를 또 넘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마침 요즘 스멀스멀 유행하고 있는 '로테이션 소개팅'이 떠올랐다. 수동적으로 앉아 인연이나 소개팅 기회를 기다리기에는 난 친구나 지인의 풀도 넓지 않았다. 바로 크리스마스에 진행하는 곳을 알아보고 신청했다.
신청과 함께 매력 세 가지를 적어 내야 했다. 그것은 참가자 명단에 나의 인적사항과 함께 꼬리표처럼 달릴 상품 태그 같은 것이었다. 스무 명 넘게 달린 참가자 명단은 마치 메뉴판 같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 나를 무엇으로 전시할까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키워드를 봤다. 피부가 좋다, 훈훈하다, 잘 웃는다, 귀염상이다... 다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고심 끝에 적어낸 것은 '멘탈이 튼튼하다'였다. 친구가 이걸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멘탈이 얼마나 좋길래 하는 궁금증이 들기는 한다고, 무슨 스님이나 수녀님쯤 되는 줄 알겠다며...
아침부터 기분 좋게 나를 꾸미고, 과하지 않게 깔끔한 옷을 입고 카페에 도착했다. 민망하지 않게 카페는 이 행사만을 위해 통대관되었다고 했다. 하긴, 여자와 남자가 회전초밥처럼 돌면서 어색한 눈웃음을 짓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서로에게 매력을 어필함과 동시에 치밀하게 상대를 분석하는 이 분위기... 칼과 방패 없는 온화한 전쟁터 같았다. 당신이 로테이션 소개팅이 궁금해서 이 글을 읽는 것이라면, 꼭 진행 장소가 통대관된 장소인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음료를 수령하고 여자 0호라고 적힌 명찰을 받았다. 명찰을 가슴에 꽂을 땐 약간의 현타가 왔지만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나에 대한 정보를 적는 프로필 카드를 받아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MBTI, 나이, 직업으로 시작해 최근 본 영화, 이상형, 좋아하는 음식, 취미 등 스몰토크를 위한 주제가 많았다. 이렇게 각자 작성한 프로필카드를 남녀가 서로 교환해 약 10분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프로필카드를 작성하는 데도 스타일이 다 달랐다. 나는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지 거기에도 구구절절 나를 드러내기에 바빴다. 대부분의 남성분들이 정말 구체적으로 적으셨네요,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스피드퀴즈 답변처럼 서울의 봄(최근 본 영화), 멍게(싫어하는 음식), 고기(좋아하는 음식)... 이런 단어만을 적었다.
나는 최근 본 영화에 서브스턴스를 적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적었다. 내 영화 취향 독특하단 걸 보고 도망갈 사람이면 애초에 다가오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아, 이렇게 해서 누군갈 만날 수는 있긴 한 걸까 싶었다. 하지만 날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내 소중한 취향인걸. 남자 두 분 정도는 서브스턴스가 무슨 영화냐고 물었는데, 차마 수상한 약물을 먹고 등골을 찢고 젊은 나를 잉태하며 그 젊은 나와 싸우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올해 칸영화제 각본상 받은 영화인데 재밌어요,라고 말했다. 칸영화제라는 친숙한 단어를 사용해 얼버무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 자신을 영화 마니아라고 칭한 남자 한 분께만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해 드렸다. 그는 나에게도 영화 하나를 추천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는 서로 스파크가 튀지 않지만 취향이 맞는 사람과는 10분이 콘텐츠 추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취향이 맞다 보면 10분이 정말 짧게 느껴진다.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면 땡, 하고 진행자가 종을 울리고 내 앞의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옆 테이블로 몸을 옮긴다. 그리고 다음 남자가 내 앞에 앉는다. 내가 참여한 로테이션 소개팅은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있어서 민망함이 덜했다.
어떤 남자분과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독서하는 남성을 정말 찾기 어려운 요즘인데, 로테이션 소개팅 자리에서는 열 명 중 세 명 정도가 독서하는 남성이었다. 나는 최근 읽은 책에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온 시집 이름을 적었다. 이 책은 무슨 책이에요?라고 물어봐 주는 남성이면 일단 호감이 갔다. 이렇게 묻는 분께 제가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온 시집이에요.라고 설명했더니 어! 지하철에서 책 읽으세요? 하며 본인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신 분이 계셨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 보기 힘든데, 여기서 만나다니, 동족을 만난 기분이랄까.
문제는 이 남자가 10명 중 극초반에 만난 남자였다는 거다. 로테이션 소개팅을 시작하기 전, 프로필 카드를 작성하며 진행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상대방에게 전할 번호 쪽지를 적는 것이었다. 나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 몇 가지와 번호를 적고 대화가 끝나면 번호 쪽지 혹은 빈 쪽지를 상대방의 쪽지함에 넣을 수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골랐는지, 안 골랐는지 바로 알 수가 없다. 일단 어떤 쪽지든 주고 가니까.
번호 쪽지는 두 개에서 많으면 세 개만 작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정된 기회를 누구에게 투자할 것인가를 골라야 한다. 이 남자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초반에 괜찮은 남자가 나타난다고 즐거워하다가도 대화가 끝나고 쪽지함에 쪽지를 넣을 때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쪽지를 초반에 다 써버리면 후반에 만난 남자에게는 쪽지를 줄 수 없으니까. 아무리 그가 꿈에 그리던 유니콘 같은 남자이더라도... 나는 운명의 장난인지 처음 만난 세 명의 남자에게 더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느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첫 세 명의 남자에게 내 쪽지를 올인했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세 명의 남자가 나중에 생각해 보더라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분들이었다.
로테이션 소개팅에 정말 특이한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이 날 운이 좋았는지 정말 평범해 보이는 남성분들만 보았다. 명함 인증을 받는 곳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리가 몇 남지 않았을 때는 키 제한도 있었다. 175 이상만 가능하다거나 하는 그런 제한이었다. 키가 큰 여자로서는 솔직히 반가웠다.
MBTI가 I인 내향형 남성들만 열 명이었다는 점도 특이했다. 물론 MBTI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대부분 내향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는 외향형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기 낸 I가 많았다. 회사와 집만 반복하다 보니 기회가 없어 친구의 소개를 받고 나왔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일까.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고 소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10명의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솔직히 마지막에 가서는 인상이 뚜렷한 남자 두세 명 외에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내가 받은 쪽지들을 갖고 장소를 유유히 퇴장한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쪽지를 확인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쪽지를 드린 남자분들과는 엇갈렸고, 다른 남자분의 쪽지를 받았다.
이렇게 내 첫 로테이션 소개팅은 끝났다. 결과는 시시했지만 이렇게 재밌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본 것 자체로 웃게 되는 크리스마스였다. 세상이 정말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다. 지금 내 나이에, 이 시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