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느낀 단상
누군가 나에게 와서 책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읽냐고 물었다.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 책이 그에겐 정말 드물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나만이 겪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가장 어두운 시기가, 낯선 누군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점에서 저는 책을 읽습니다. 거기서 나는 비로소 이해받습니다.
먼저 글을 쓴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부려본 적 없던 용기를 부렸다. 시야를 방해하는 실눈곱 같은 감정을 집어내 올곧은 선으로 펼쳐놓고 싶었다. 캄캄한 상자 속으로 손을 뻗어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더듬거리며 찾는 작업은 자가 치유의 과정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직육면체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가락 끝으로 어두컴컴한 속을 더듬어보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어디서부터 간직했는지 모를 낯선 습기, 손끝으로만 볼 수 있는 자잘한 굴곡을 느낄 수 있다.
내 고민은 이것이었다. 이렇게 쓴 글을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며 첫 고민은 해결되었다. 글은 아무래도 혼자 쓰고 간직하는 것보다 낯선 타인에게 공개하는 시점에서 완전히 다른 맛을 지니게 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치부를 무책임하게 늘어놓고 발행한 순간 내 못난 죄가 다 손쉽게 구원받는 기분이 든다.
다음으로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에세이는 허구의 영역이 아니다. 작가 본인이 경험하고 느낀 바를 글로 풀어낸 것이기 때문에 글은 곧 체험의 증언이다. 거짓이 섞일 틈이 없다. 더 좋은 글을 위해서는 더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다. 마음 더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엇을 건드리려고 하는지도 알지 못 한 채. 이것은 때로 연약한 부분을 찌르는 고통을 수반했다. 글을 그만 쓰고 싶다는 충동을 들게 하기도 했다.
나는 이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은 허구가 끼어들 틈이 있는 고슬고슬한 백미밥 같았다. 나의 경험에서 수확한 (모든 상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하얀 쌀알 사이사이에 잡곡과 현미, 때론 밤과 고구마를 넣으면 더 맛있어질 것 같았다. 멋있어질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쉽게 만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알았다. 소설도 다른 모든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내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가 써 내려갈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내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여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창조한 이들의 시간은 도무지 흐르지 못했다.
결국 몇 가지 소재의 소설을 쓰다 만 채로 두고, 새 소설을 시작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나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이것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가 고민하던 찰나에 아니 에르노를 접했다. 이렇게 시기적절한 선택이 있나.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소설 하면 바로 떠오르는 프랑스 문단의 작가다. 그녀가 직접 겪은 불법 낙태와 외도, 가족과의 이야기는 모두 그녀의 소설이 되었다. 아니 에르노는 <사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아니 에르노 <사건> p.79
소설 쓰기는 에세이 쓰기와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소설을 읽기만 하던 내가 소설을 쓴다는 데서 오는 자아 도취감. 퇴근하고 뭐 하세요?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소설을 씁니다,라는 뚱딴지같은 대답을 하며 느끼는 우쭐함. 이런 추하지만 솔직한 감정 외에도 분명 인생의 새 영역을 밝힌 듯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영역에 대해 글로 풀어내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 그것은 소설을 '쓰면서' 느낀 단상이라는 글을 언젠가 쓰게 된다면 그곳에 적어내고 싶다. 참고로 이 글의 부제목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느낀 단상>이다.
내 소설이 얼마나 나의 이야기를 담아낼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 이 불확실함마저 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은 나를 향한 사랑의 증거다. 이는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모든 글 쓰는 이들을 향한 존경의 근원이다. 나도 감히 나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