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기억의 가벼움

Obliviate

by soormj

이직한 지 3개월쯤 되던 날, 전 직장의 사업자등록번호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10자리의 숫자는 근 10년 동안 하루에 수십 번씩 입력하던 아주 익숙한 숫자였지만 도무지 더는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 계좌를 써야 했던 곳에 무의식적으로 회사 사업자등록번호를 써서 곤란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숫자였는데 고작 3개월 만이라니. 아마 내게 더 이상 무의미한 숫자가 되었기 때문에, 뇌가 알아서 자동삭제처리를 한 모양이다. 그제야 더 이상 그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매직넘버세븐‘이라는 개념이 있다. 아무 의미 없는 숫자는 평균적으로 7개까지가 한계요, 8개부터는 외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화번호가 7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런데 종종 우리는 그 한계를 넘기도 한다. 주민등록번호라든지, 계좌번호라든지, 위의 사업자등록번호 같은 숫자를 아주 익숙하게 외운다.


신기하다. 그저 일련번호일 뿐인데, 익숙하고 의미 있는 숫자들은 발음했을 때 특유의 리듬감이 있다. 이를테면 내 생년월일인 860411.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이 숫자들이 내게는 86과 04, 그리고 11이 태초부터 끈끈하게 이어져온 운명적인 조합으로 느껴진다.


반면에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들은 발음해보려 해도 혀 위에서 어색하게 돌뿐이다. 입 밖으로 뱉어보면 공기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빽빽한 공기를 억지로 비집고 끼어들어가는 듯한 어색함이 든다.


그래도 궁금한 마음에, 그 사업자번호를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특유의 리듬감을 느끼며 하루에 수십 번씩 외던 숫자임이 분명한데, 이제는 서로 맞지 않는 숫자들을 억지로 붙여놓은 것처럼 어색하다. 그 숫자들이 내 입에 자연스럽게 붙어 어우러지던 시절은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의 이름, 생일, 좋아하던 노랫말까지도 여전히 선명한 건, 아직도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일까. 착각이길 바란다. 언젠가는 그 조차도 이 숫자처럼 잊히길. 내게서 무의미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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