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ness
이직 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날, 회의가 잡혔다. 엘리베이터에서 5층이 아닌 9층을 누르는 것부터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던 그 시절의 나는 ‘어쩔 수 없는 월급도둑’으로의 마지막 양심을 지키기 위해, ’먼저라도 가 있자‘ 싶어 10분 먼저 회의실을 찾았고 조용히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둘씩 들어오는 사람들.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는데, 어딘가 어색하다. 아뿔싸. 모두들 한 손에는 커피를 - 이 부분은 그렇수 있지 - 다른 한 손에는 노트북을 챙겼다. 지난 10년간의 습관대로 챙겨 온 노트와 펜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70년간 냉동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어느 슈퍼히어로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런 슈퍼파워도 없이. 나는 태연한 척 노트를 뒤적거리다가도, 괜한 주의를 끌까 싶어 탁 덮었고, 또 아무것도 안 하는 나 자신이 어색해 괜히 뭔가를 끄적이는 척을 하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회의에서 가장 분주했던 건 겨우 입사 7일 차의 나였을지도.
다소 장황하게 부끄러운 기억을 꺼냈지만, 사실 ‘대기업 계열사와 스타트업 회의 문화 차이에 대한 고찰’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회의에서 노트와 펜을 사용하지 않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쥘 일도 줄었고,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급하게 메모지에 통화내용을 메모하려다 문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쪽 머리로 통화 속 업무 내용을 소화하다가도, 다른 한쪽으로는 내 글씨가 왜 이렇지? 하는 불편함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글씨가 '단정하다'는 칭찬을 흔히 들었던 나는 분명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키보드와 스마트폰을 쥐는 게 더 익숙해진 손에 어색하게 쥐어진 볼펜은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글씨는 마음의 거울‘라는 흔한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마음이 단정하지 않은 사람인가? 아주 사소한 메모지와 볼펜에서부터 통렬한 자기반성까지 걸린 시간은 단 30초.
글씨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샜지만, 사실 ‘글씨와 이에 투영된 인간 심리’ 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앞서 했던 자기반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건, 그건 너무나도 내밀한 이야기니까.
사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할 줄 알던 것을 더 이상 잘하지 못하게 되는 건 얼마나 마음 아픈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글씨 쓰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치 자전거처럼 한 번 배워두면 영원할 것이라고, 내 글씨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반듯하던 글씨가 삐뚤빼뚤해지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쏟아지던 나는 이제 펜을 들고 가만히 종이에 눈싸움만 걸고 있다. 마음먹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이곤 했는데, 마음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은 이제 서로 대화 한 마디 없는 권태기에 빠진 한 쌍이 되어버렸다.
잘하던 것을 더 이상 잘하지 못하게 되는 건, 단순히 하나의 기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잘하던 나‘를 잃는 듯한 기분이 든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깨달음도 처음엔 글씨가 망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을까?
그리고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은 또 얼마나 큰 상실감을 가져다줄까 싶어, 당연하다 여겨왔던 모든 사람과 사물, 그리고 시간과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자기 고백은 너무 내밀한 이야기라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어느새 저질러버렸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