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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맨 스탠딩: No Man Behind』 #5

5화. 한도 없음

by soormj
유설화입니다. MC 팀장이에요.


'MC 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설화는 삼십 대 중후반의 여성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깡마른 체구, 평생 햇빛이라는 걸 본 적은 있을까 싶은 창백한 피부.


“실장님, 물 한잔 드시면서 잠시 열 좀 식히고 오시는 게 어떠세요? 저도 어차피 인사는 나눠야 하니까요.:


유설화의 말에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깨달은 공 실장은,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자리를 양보하고 브리핑룸을 빠져나갔다. 나이로보나, 불리는 직급으로 보나 T/F 총괄인 공실장보다 하급자임이 분명한데도 말 한마디로 그를 진정시켰다. 창백한 피부만큼이나 새하얀 가운과 가슴에 품은 의료차트가 어색하지 않았다. 의사일까? 뭔진 몰라도, 만약 의사보다 ‘더 잘난’ 직업이 있다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설화가 마주 앉자, 공 실장이나 경호원들 같은 덩치 앞과는 또 다른 종류의 위축감이 느껴졌다.


생글 웃으며 다정한 말투를 가졌지만, 차갑다고 느꼈다. 남인규는 잘 알고 있다. 유설화 같은 여자들은 마치 DNA에 각인이라도 된 듯, 하나같이 ‘나 같은 남자’에게 최소한의 사회성만 내비친다. 하지만 냉담한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한다. 이 건 이성으로서의 거부나 싫어함이 아니다. ‘차가움’은 ‘열이 없음’을 뜻하듯, 그들 역시 나를 향해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는 것이다.


유설화의 시선이 닿 자 남인규는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공 실장이 열을 올리며 데워놓은 공기에 유설화의 차가운 눈빛이 닿자, 남인규의 이마엔 습기가 송글 맺혔다.


“본의 아니게 엿들었네요. 미안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인규 씨가 말씀하신 노인 분들이나 환자분들은..”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비정했나 싶었던 남인규.


“이 시스템은, 단 한 번의 심리적 흔들림도, 전체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구조예요. 저희로선 그분들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최후의 순간’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몸만큼이나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는 분들이라.”


‘심리적 흔들림이라… 하긴, 애초에 머릿속이 텅 비어 있다면 흔들릴 일도 없겠네. 그렇다면 내가 적임자일 수도. 인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놀라서는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류의 미래를 불확실성… 그러니까 ‘확률’에 걸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선내에는 첨단 의료 시설까지 갖춰져 있어요. 그 안에 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게 훨씬 ‘인도적’ 일 겁니다. 유팀장, 수고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제가 맡죠”


어느새 브리핑룸으로 돌아온 공 실장에게 유설화는 자리를 양보했다. 공 실장이 자리에 앉자, 유설화가 작은 메모를 건넸다. 공 실장이 그녀를 돌아보자, 유설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까지 흥분했다가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로 진정할 수 있나 싶은 공 실장을 보며, 남인규는 이 모든 것이 연극같이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시작(인류가 지구를 떠난다 라는 사실)부터 꿈같은 이야기니까.


“아까 ‘당첨’이라는 말을 저도 모르게 했네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공 실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설명드릴 내용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봅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남인규 씨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나쁜 조건이 아니라고? 나 홀로 지구에 남는 것보다 나쁜 조건이라면, 당신과 영원히 이 방에 단 둘이 갇힌다는 것 정도일 텐데.


“남인규 씨는 남은 1년간,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도 누릴 수 없었던,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혜택을 대충 훑어봤는데, 인규 씨도 만족할 겁니다. 진시황,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 역사상 그 누구라도 인규 씨 앞에는 2등입니다.”


남인규가 ‘대우’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는데, 딱딱해진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공 실장이 웃으며 던진 한 마디가 가슴에 콕 박혔다.


“솔직한 심경으로 조금 부러울 정도더군요. 하하하”


“지금 나를 놀리는 겁니까?”


전화를 받은 그 이후 처음으로 인규는 반항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윤실장은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공손히 사과했다.


“제가 또 실수를 했군요.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그 정도로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공 실장은 국정원 소속이다. 아니 직업을 생각지 않더라도 그의 체격을 보건대 인규가 반항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혜택이라는 것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우라는 건… 그러니까 혜택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죠?”


남인규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물꼬가 트인 것인지, 공 실장의 설명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남인규 씨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남은 1년간, 생활환경이나,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남인규 씨는 ‘최대한의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남인규 씨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지원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심하지만 않다면 다소 불법적인 일도 괜찮습니다. 그런 부분이야 말로 저희 전문이니까요”


“최대한의 자유라면 어떤 정도를 말하는 거죠?”


“무한대”


“네?”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받는다 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공실장은 씩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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