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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맨 스탠딩: No Man Behind』 #4

4화. 당신은 지구에 남습니다.

by soormj
남인규씨, 당신은 지구에 남습니다.

“저기,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아니 잘 못 들은 게 아니라. 듣긴 들었는데.. 아까 뉴스.. 아니 기자회견에서는, 우주선이.. 그런데 제가 무슨..”


조금 위축되기는 했어도,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잘 대처해 오던 남인규의 입에서는 앞 뒤가 전혀 맞지 않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니, 말이라고도 보기 어려웠다. 머릿속에서는 무작위의 단어들이 떠올랐고, 남인규는 편집 없이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었다. 지금 무엇이 남인규를 혼란스럽게 하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이 궁금한지 조차 잊은 것 같아 보였다.


‘어쩐지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했지’ 공 실장은 또다시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마치 첫 번째 시도에서는 자신의 발음이나 억양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에 남인규가 이해를 어려워했다는 듯이, 훨씬 또박또박 천천히.


“남인규 씨, 당신은 지구를 떠나지 않습니다.”


“…”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고 있는 말들이 이 상황은커녕, 자신의 궁금증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인규는 급기야 입을 닫았다. 남인규의 건물 내부를 훑던 시선을, 감상을,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마음까지도 꿰뚫어 볼 줄 아는 공 실장이 자신의 궁금증까지 꿰뚫어봐 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회견은 보신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공 실장은 남인규의 입에서 나오는 무작위의 단어 중 몇 가지를 포착해, 설명을 시작할 지점을 설정했다. 확실히 두꺼운 매뉴얼보다 이 쪽이 공 실장의 전문 분야다. 시작점이 잡히자마자, 책자를 뒤적이며 난감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끄럽고 명확한 설명이 이어진다.


전 인류가 동시에 탑승할 이주선이 개발되었고, 디데이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후다. 다만, 이주선은 지구를 출발하여 우주상에 대기 중인 모선과 결합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지상 관제센터에서의 관제 시스템 제어가 필요하다. 문제는, 양자컴퓨팅 기반 제어시스템이 이상기후 영향으로 발생하는 전자기파와 간섭을 일으키기고 있고, 이를 자동화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 개발에는 최소 2년 이상이 걸린다.(이 부분은 기계공학적 지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공실장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에 설명이 정확한지는 미지수다.) 어찌 됐든, 기온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오르고 있으며, 2년의 지체는 인류 존속에 치명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상 시스템 제어 작업을 맡게 된 사람이 바로 당신, 남인규다.


“이해되셨나요?”


자신의 매끄러운 설명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는지, 공실장은 남인규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의례적으로 이해 여부를 물었다.


하지만,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인규의 머릿속에는 오히려 더 많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기자 회견에서 똑똑히 들었습니다. 전 인류가 모두 이주를 한다고요, 단 한 명도 빼놓지 않는다고요.”


“No Man Behind. 맞습니다. 기억력 좋으시네.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공 실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인류 이주 프로젝트는 초창기부터 논란이 많았다. 찜통이 되어가는 지구에 소외받은 사람들을 버려둔 채, 특정 계층이나 국가만 새로운 낙원으로 향할 것이다 음모론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프로젝트 개발팀에 ‘No Man Behind’ 무리한 미션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 무리한 목표도 결국에는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발이 완료된 지상 관제 시스템에서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기 전 까지는.


“그리고, 조금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 인류의 이주 목표가 완전히 달성되지 않으면,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거대한 명문 자체가 흔들린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미국정부로서는 정치적 타격이 상당하다. 물론 미국의 최우방국인 우리 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10억 분의 1, 성공률 99.9999… 퍼센트는 통계적으로 충분히 납득가능한 오차범위 안에 있으므로, 대외적으로 No Man Behind라고 공표한 것, 그 자체는 전혀 무리가 없다.


‘이 봐. 당신은 나랑 같은 한국인이잖아. 대체 누구 편인 거야.’ 눈앞의 자국민보다 태평양 너무 우방국의 정치적 입지에 더 관심이 있는 공 실장의 태도가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에, 정작 ‘오차범위’라는 표현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럼 어쩌다가 제가 그 ‘오차범위’에 들게 된 거죠? 관제 지상 제어… 여하튼 그 걸 제가 할 수나 있습니까? 국정원이라면서 제가 운전면허도 없다는 건 모르시나 보네요.”


“전 세계 정상 간 합의를 통해 인류 10억 명 전원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첨을 했어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그리고 당첨자가 바로 남인규 씨 당신입니다.”


‘당첨이라니, 그래서 내가 지금 기뻐해야 된다는 말인가?’ 복권은커녕 음료수 뚜껑에 쓰인 ‘한병 더’라는 글씨조차 본 적 없는 남인규는 하필 10억 분의 1의 확률에 따라 선택되어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배웅하게 되었다.


“한국은 추첨대상에서 제외해 보려고 저희로서도 온갖 짓을 다 해봤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미묘한 방법까지 포함해서요. 하지만, 미국이 추첨에 참여한다고 하는데, 우린들 어쩌겠습니까?”


공 실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우리는 남인규 씨 편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같은 편 좋아하시네. 행성조차 공유 못 하겠다는 인간들이…’ 남인규는 공실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 토를 달았다. 마음속으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혹시 내가 소리 내어서 말했나?’


공실장은 혼란스러운 남인규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1년간 지상 관제 시스템 제어 훈련을 받게 됩니다.”


“내가 싫다면요?”


공실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 통화했을 때의 느꼈던 위압감이 이번에는 눈앞에서 직접 피어올랐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훨씬 더 날카로워졌다.


“이봐요, 남인규 씨. 전 세계가 합의 한 공정한 추첨의 결과라고요. 이게 우스워요? 당신 개인감정으로 거부한다고 하면, 그래서 다시 추첨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 뽑히는 사람은요. 그 사람은 무슨 죄입니까?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남인규는 공 실장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논리의 허점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고양이에 좇기는 생쥐가 당장 눈앞에 가까이 보이는 출구로 뛰어들어가듯, 생각나는 아무 단어나 붙잡고 늘어졌다.


“대체 왜 무작위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나 2년 안에 죽을 환자, 아무튼 그런 사람들도 많을 것 아니에요.”


공 실장은 입을 꾹 다문채 몇 초간 남인규를 노려보았다. 평점심을 붙잡으려는 듯 숨을 깊게 내쉬었지만, 불규칙하게 떨리는 호흡은 오히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폭발했다.


“사람의 생명을 그딴 식으로 저울질할 셈이야? 그 사람들은 이미 고통을 겪고 있어. 그건 너무.. 아무리 무심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게..”


갑자기 인류애가 발동한 것일까 아니면 인규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것일까. 혹은 브리핑 매뉴얼에 쓰여있는 ‘대응 지침’을 따르는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태도는 사라지고, 공 실장의 목소리에서는 흥분이 끓어올랐다. 문장을 끝낼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공 실장의 말을, 새로운 목소리가 이어받았다.


“비윤리적이죠.”


깜짝 놀란 남인규가 뒤를 돌아봤을 때,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유설화입니다. MC 팀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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