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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맨 스탠딩: No Man Behind』 #3

3화. 브리핑

by soormj
그 말을 정확하게 들었고 그 의미도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지만 그 뜻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드디어 뵙네요, 남인규 씨. 반갑습니다. LMS T/F 총괄 공두원입니다. 편하게 공 실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공 실장이 악수를 청하려 손을 먼저 내밀었다. 그의 팔뚝은 남인규의 허벅지보다도 굵었고, 허벅지는 인규의 허리보다도 굵어 보였다. 남인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공실장의 손을 엉거주춤 잡았다. 체급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위압감은, 단지 손만 잡았을 뿐인데도 어깨까지 짓눌렀다. 남인규는 지금 느끼는 위압감이 공실장이 품은 적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 실장 같은 사람은 나에게 적의는커녕,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조차 품지 않는다. 그에게 남인규라는 존재는 위협의 대상조차 아니다. 오히려 벌이나 거미 같은 것들이 더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일 것이다.


남인규는 눈으로 빠르고 아주 미묘하게 주위를 훑었다. 로비와 몇 개의 방, 꼭 병원 같다. 특별할 것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장식이나, 안내판 같은 것이 없다는 점 정도.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모든 것이 새것 같다.


“특별할 건 없습니다.”


들키지 않으려 빠르게 내부를 살폈건만, 어느새 공실장은 남인규의 시선을 읽은 모양이다. 시선뿐 아니라 감상까지도 정확하게 읽어냈다. 뜨끔했다. ‘이 사람 어디까지 들여다보는 거야?’ 하지만 굳이 남인규의 감상을 소리 내어 읽은 것을 보면, 시선을 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까지는 읽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그런 마음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특별한 쪽은 남인규 씨죠. 이 공간은 ‘회사’에서 남인규 씨와 이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것입니다. 혹시 그림이나 포스터 같은 장식이 필요하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혹시 '그런 쪽'이 취향이시라면, 그쪽으로 장식해도 상관없고요. 저희 직원들이 구해다 드릴 겁니다.”


위압적이던 공실장의 표정에 비릿한 웃음이 스며든 걸 보니, ‘그런 그림’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제껏 주위의 표정과, 어조,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읽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던 남인규였지만, 자칫 조롱으로 느껴질 수 있는 공 실장의 말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특별한’과 ‘남인규 씨’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억지로 끼워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제가 너무 앞서나간 모양이네요.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브리핑룸으로 가시죠.”


혼란스러운 표정까지 성공적으로 읽어낸 공 실장은 남인규를 ‘브리핑룸’으로 안내했다. 거창한 이름에 비해 역시나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는 정확히 두 명이 마주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방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높이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아시다시피 이상기온 영향으로 2025년 70억에 달하던 지구 인구는 2068년 현재 10억 미만으로…”


“역사 강의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학교는 졸업한 지 10년도 넘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더 급했기 때문에, 인규는 처음으로 공실장의 말을 끊었다. 다급한 마음에 실수를 한 것 같아 공 실장의 표정을 살피는데, 이 사람, 거추장한 절차를 건너뛰게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표정이 밝다.


“그럼 다음 부분으로 바로 넘어갔습니다. 시작이 좋군요.”


공 실장은 손에 쥔 책자 — ‘브리핑 매뉴얼’이라고 쓰여있다 — 를 몇 장 넘기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뉴스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1년 후 인류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게 됩니다. 행성의 이름은 P138292, 지구 지름의 약 0.8배이고, 자전 주기는…”


공 실장은 매뉴얼을 이어 읽다 말고, 말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부분도 중요한 내용이 없네요. 여기도 빠르게 넘어가죠.”


남인규는 뉴스 보도를 대충 보긴 했지만, 귀 기울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부분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인류가 찾은 새로운 집은 어떤 곳이라는 거야? 실온에 음식을 몇 시간이나 내놓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공 실장의 표정과 말하는 템포를 보았을 때, 그 부분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말을 끊은 것도 충분히 용기 있는 시도였다. 무엇보다 도대체 이게 모두 무슨 일인지 ‘핵심정보’에 빨리 다다르고 싶다.


“여기도 아닌 것 같고.. ‘전략적 우주 이주 실행단계 통합 계획 요약안에 대한 개별 세부 지침 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런 이름은 무슨 생각으로 짓는 거야.”


한숨을 후 내뱉더니, 공 실장은 매뉴얼을 몇 페이지를 더 넘기고 손가락으로 종이를 훑어 내린다. ‘브리핑’을 재개할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다. 이내 아니다 싶었는지 입으로 ‘씁’ 소리를 내고서는, 몇 장을 더 넘긴다. 그리고 시작점을 재탐색한다. 역시나 실패. 이 행위는 몇 번이고 반복된다.


‘이 사람들, 대체 브리핑이라는 단어의 뜻은 알긴 하는 거야?’ 초조해진 인규는 속마음을 소리 내어 말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공 실장은 포기했다는 듯 매뉴얼을 덮고 탁자에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주 간결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남인규는 그 말을 정확하게 들었고 그 의미도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지만 그 뜻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핵심은 이겁니다. 인류가 지구를 떠나는 그날, 남인규 씨 당신은 지구에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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