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지 못하는 사람

Let me dance to your...

by soormj

고양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조용하고, 혼자를 즐기는 사람들더러 고양이 같다고들 한다. 강아지 같은 사람들도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나 정이 많은 타입들이다. 마찬가지로, 호랑이 같은 선생님이나 여우 같은 아가씨도, 곰 같은 남편도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동물에 빗대고는 한다. 과연 나는 어떤 동물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 절대 고래는 아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나는 춤은커녕 어딘가 고장이 나버리는 타입이다. 칭찬이라는 입력값을 처리하는 장치가 몸 안 어딘가에 있다면, 내 것은 망가져버린 것이 틀림없다. 지나친 칭찬으로 생긴 과부하로 터져 버렸거나, 칭찬 들을 일이 많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퇴화해 버렸거나.


내 키는 딱 180센티미터이다. (사실 건강검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4년 전에는 181.4센티였는데, 2년 전에는 180.6센티가 되더니 최근에는 180.3센티) 그래서인지 가끔 ‘키가 크시네요’하는 말을 듣는다.


칭찬의 의미로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1. “네, 감사합니다” : 너무 쉽게 인정해 버리는 모양이 거만해 보이지 않을까?
2. “아버지가 큰 편이세요” : 사실 여동생이 키가 큰 편이 아니라서 ‘엄밀히’는 맞지 않는 대답이다.
3. “뭘요.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에요” : 혹시 상대방이 키가 콤플렉스라면 오히려 상처가 되지 않을까?
4. “그쪽은 키가 몇이세요?” : 나는 이 사람과 이유 없이 싸우고 싶지 않다.


사실 키가 크다는 사실이 왜 칭찬의 소재로 쓰이는지 근본적인 의아함이 든다. 내 의지나 노력과는 아무런 (혹은 아주 적은) 관계없이 갖게 된 것들, 이를테면 ‘잘 생겼다’ 라거나 ‘집이 부유하다’, 혹은 ‘목소리가 좋다’ 같은 칭찬들이 모두 그러하다. (주의 : 이런 칭찬을 실제로 들은 건 아닙니다. 단순히 예시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하는 사춘기 학생 같은 마음이 턱아래까지 차오르고는 간신히 참아낸다.


어쩌면 칭찬을 처리하는 장치가 망가진 게 아니라, ‘칭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장치’가 망가져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칭찬을 처리하는 장치는 멀쩡하지만 활약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억울하게도 ‘망가졌다’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일지도.


똑같은 원리로, 욕을 들어먹어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인 나에게 ‘너 참 까맣다’라는 식의 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뭐?)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길가는 행인도 한 번 쓱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네가 다시 한번 소리 내어서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칭찬도, 욕도 그저 일상적인 소음처럼 흘려듣는 편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일전에 어디선가 잔뜩 욕을 먹고 와서는 시무룩해진 회사 후배에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길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야이 XXX야’라고 한 마디 한다고 해서,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 그냥 미친놈이네, 술 마셨나? 하고 넘어갈 것 아냐. 지금도 마찬가지야. 별 일 아닌 걸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미친놈이네 하고 넘어가버려”


하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 하나, 그 친구는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야이 XXX야 라고 해도 충분히 하루 종일 기분 나빠할 성격이었단 것.


사실 칭찬보다도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내가 ‘해낸 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해 누군가 신랄하게 깎아내린다 하더라도, 그 비판하는 시각과 내용이 내가 이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단순히 ‘글을 잘 쓰네요’하는 두루뭉술한 칭찬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읽어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칭찬은 아무 의미 없다’라는 씨니컬함도, ‘욕먹고 기분 나빠하는 당신은 약한 멘털이군요’하는 비하의 의도도 절대 없음을 밝힌다. 다만, 타인의 이야기에 마음이 크게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그래선 안된다’는게 아니다. 우린 어차피 이 필요 없는 일들을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가지씩 하며 살아간다. 타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 기쁨을 충분히 만끽해도 좋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고래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마음껏 칭찬하고 그들을 춤추게 합시다.

가능하다면, 욕은 조금만 덜 하려고 노력하고요.

그리고 정말 멋진 건, 타인을 정확히 이해해보려고 하는 다정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맞추어서는 나 같은 사람도 충분히 춤출 수 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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