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층짜리 깨달음

9F Epiphany

by soormj
점검 중


퇴근길이 드물게도 순조롭다 싶더니,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엘리베이터 앞 세 글자가 내 발걸음을 막아섰다. '그래, 운동부족이긴 했어. 온 세상이 내 운동을 응원하는구나.' 밀려오는 짜증을 틀어막기 위해 초월적 긍정을 소환해 본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사람들(하지만 나와 크게 상관없는 그들)이 인류의 한계를 증명했듯, 나 역시 인류의 한 명으로서 나만의 무언가를(그런데 무엇을?) 증명해 보겠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9층이겠지만, 나에게는 무려 9층이다. 집에 도착하면, 옷은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에어컨을 잔뜩 틀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당당하게 나태함을 즐길 것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1층.

2층.

…3층


마음가짐만으로 가능한 것은 2층이 한계였다. 3층부터는 슬슬 버겁다. 엄홍길 대장이 에베레스트에서 인류의 최고(催高)를 증명했다면, 서울시 은평구의 나는 인류의 최저(最低)를 증명한 사례로 남는 것이 아닐까.


고통은 잡념을 부른다. 한걸음 한걸음에 온갖 생각이 밀려왔다가 또 밀려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 발걸음에 눈이 간다.


계단을 오를 때엔 단차만큼만 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단차보다 조금 더 높게 발을 들어 올린 후 내려 딛는 식으로 계단을 오른다. 그러니까, 20센티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30센티 높이로 발을 들어 올린 후 10센티를 내려 밟는 것이다.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다.


고통을 잊는 데에는 잡념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머릿속으로 정확히 계산을 해보자.

한 층에 계단이 스무 개 정도고, 나는 총 8개 층을 올라야 하니까 아래와 같이 계산된다.


(들어 올리는 발의 높이 30cm - 계단의 단차 20cm) x 20 계단 x 8층 = 16미터


한 층의 층고가 2.5미터라고 가정하면 약 7개 층.

즉, 나는 9층을 오르는데 총 16개 층의 힘을 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계산을 해보니,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은 ‘손해를 보고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손해를 줄여보고 싶어서, 최대한 단차만큼만 발을 올릴 후 계단을 딛는 식으로 걸음걸이를 바꿔본다. 그 차이는 줄어들지만 오히려 어렵다. 자세가 어색할뿐더러, 매 발걸음에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피로감은 배가 된다.




어쩌면 사람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기 위해서는 그보다 크게 입을 벌려야 한다.

부쩍 살이 오른 내 몸을 바지에 넣기 위해서는 허리둘레보다 더 넓게 바지를 잡아 벌려야 한다.

약속이 오후 2시면 1시 5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한 달 생활비가 100만 원이면, 통장에 110만 원은 있어야 안심이 된다.


과연, 최적화라는 개념은 환상인가?


집을 구해보면 그렇다. 면적이 마음에 들면 구조가 별로고, 구조가 마음에 들면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방향이 마음에 들면 동네가 성에 안 차고, 동네까지 마음에 들면? 통장잔고가 허락하지 않는다.(대출한도도 대체로 통장잔고와 같은 의견이다.)


손해를 보거나 낭비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계단 오르는 것 같이 사소한 일에도 의도치 않은 비효율이 존재한다. 이 세상은 수많은 낭비와 비효율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타협(트레이드오프)이라는 방법으로 살아간다. 다시 말하자면, 삶의 모든 선택지는 각자의 관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적정한 비율로 벼려낸 포트폴리오이다. 오르내림이야말로 ‘맛있는 삶’의 레시피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마찬가지.


모두들 운명이 점지해 주는 소울메이트를 바라겠지만,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는가? (계단과 바지로부터 귀납적으로 추론해 낸 운명론에 대한 반박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존재한들, ‘최적화된 발 들어 올림’이 오히려 계단을 불편하게 오르게 하듯, 내게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 보듬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최선이자, 진정한 ‘소울메이트’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낭비를 두려워 않고, 비효율을 기꺼이 감수하고, 여유를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어차피 삶이란 그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내 삶을 사랑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이 되겠다.


단지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의미 있는 무언가를 깨달은 기분이다.

이 정도면 인류의 최저(最低)는 면한 게 아닐까.

조금 더 당당하게 옷을 팽개치고, 에어컨을 더욱 세게 틀고, 소파에 누워 나태함을 즐길 자격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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