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뮤지엄(Rijksmuseum)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대신 방문객들에게 관람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스케치북과 연필을 무료로 나누어 준다고 한다. 기존의 수동적인 관람 경험에서 작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전환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잘 그릴 수 없어도 좋다. 그리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것을 유심히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스케치를 하게 되면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구성과 디테일과 선 등 화가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예전에 허핑턴포스트에서 이 글을 보고 학생들과 꼭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얼마 전 드디어 실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루벤스 세기의 거장들'을 보고 왔다. 초심자에게는 현대 미술보다는 미술책에서 많이 보던 친숙한 그림이 좋을 거 같아서 골라 보았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점. 일부러 이른 시간에 갔는데도 너무 많았다. 흑.)
셋이 갔는데 세 명의 관람 방법과 그리는 방식이 다 달랐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쌤
나는 일단 전시실을 한번 쭉 훑었다. 어디에 어떤 작품 있는지 확인하고 이따가 저건 조금 더 자세히 봐야지, 점찍어두며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기고 싶은 게 많아 순간의 인상만 기록했다. 닮게 그리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거 같아서 느낌만 남겼고 하나 그리는데 5분 정도씩 걸렸다. 셋 중 제일 많이 그렸지만 제일 간단하게(대충) 그렸다.
학생 1호
미희는 전시실의 모든 작품을 다 봐야 한다는 욕심 없이 한 작품씩 차근차근 관람하면서 관심 있는 작품 앞에서는 오래 머무르며 관찰했다. 그중 일부를 그림으로 남겼다. 하나하나 정성 들여서 오래 그렸다.
학생 2호
유선님은 둘러보다가 한 작품에 꽂히고는 그 그림만 그렸다. 우리 셋 중 유일하게 수채화로 채색까지 했다. 작품 앞에 앉아 채색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스케치만 해두고 작품과 떨어진 구석자리 의자에 따로 앉아 기억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처음에 그릴 때는 좀 부담스러웠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 그림만 쳐다보는 거 같았다. 근데 좀 적응하고 나니까 재밌었다.
그림을 자세하게 보게 되며 작가의 의도나 표현 기법에 감탄하게 되었다. 어떻게 볼을 저렇게 뽀송하게 그렸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등 많은 생각을 하며 그릴 수 있었다.
잠깐 봤으면 놓쳤을 사소한 디테일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구석에 어둠 속에 개가 있었다든지 보물 찾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난 후 작가가 내게만 귓속말로 사실은 이런 것도 있어,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 주인공은 르누아르 '시골 무도회' 보며 춤을 추는 두 남녀 외 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빼꼼이 누나'를 발견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나의 시선 따라 그림에 대한 나만의 능동적인 경험이 생기게 된다.
한 곳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얘기도 듣게 되어 좋았다. 도슨트 얘기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고, 같은 그림에 대해 각자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감상평을 들을 수 있었다.
유럽의 미술관을 가면 한 곳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무리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아예 작정하고 이젤 펼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있다. 구글에서 'museum drawing tour'를 검색해보면 앞서 소개한 레이크스뮤지엄 외에도 드로잉 투어를 제공하는 미술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가족 단위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초보자에서부터 준전문가까지 뮤지엄마다 다양하다. 우리나라는 이런 프로그램이 아직 없거나.. 네이버/다음에서는 검색이 잘 안되는 거 같다. (저에게 연락 주시면 프로그램 잘 짜드리겠습니다. ㅋㅋ)
이번에 미술관에서 드로잉 해보며 영 빨쭘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종종 다녀야겠다. 우리나라도 이런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야매스케치 전체 글 보기
instagram @soosca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