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업들은 굳이 즐기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디자인은 디자인하는 일을 즐기지 않으면 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디자인하기를 즐기고, 또 그러다 보니 열심히 일하게 마련이지요. 때로는 열정 페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왜 디자인이 뜻대로 되지 않을까요.
디자인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디자이너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시간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는 스트레스가 많이 받거나, 아니면 같이 일하는 사람과 팀워크가 맞지 않거나. 즐겁게 그리고 쓸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서 디자인을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까요?
"그네가 디자인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이 달린 이 그림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실제로 거의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일어납니다. 이 그림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네를 디자인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한번 따라가 봅시다.
1단계. 마케팅 부서 (그림에서는 sales)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나무에 매달 수 있는 그네의 개발을 요청합니다. 히트를 칠 만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중의 제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트가 세 겹으로 달린 "디럭스" 버전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2단계. 디자인 부서 (그림에서는 designer)에서는 마케팅 부서의 요청을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디자이너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또 세 겹의 시트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므로 수많은 스케치를 하면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 즉 로프가 세 개 달린 그네입니다. 다리를 로프 사이에 각각 안정감 있게 넣고 탈 수 있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3단계. 설계 부서 (그림에서는 production engineer)에서는 디자인을 보면서 역시 디자이너들이란 원가 개념이 없다고 혀를 찹니다. 가운데의 로프는 쓸데없는 거니까 없애버리고 또 나무줄기에 가까이 있는 로프는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 나무줄기에 바로 맬 수 있는 길이로 줄여 버립니다.
4단계. 생산 부서 (works)에서는 설계 부서의 도면을 보고는 재고 개념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각기 다른 길이의 로프를 준비하는 건 비효율적이거든요. 결국 같은 길이의 로프가 두 개 달린 그네를 생산합니다. 게다가 안전성을 고려하여 나무의 한 쪽 가지에 다는 것보다는 중앙에 설치하도록 설치 매뉴얼을 작성합니다.
5단계. 시공 부서 (service engineer)에서는 이 제품을 소비자의 뒷마당에 설치하러 갑니다. 한데 설치 매뉴얼대로 매달고 나니까 그네가 나무에 걸려서 안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무줄기를 "적당히" 잘라내고 그네의 설치를 마친 후 철수합니다.
6단계. 집에 돌아온 구매자 (여기서는 customer)는 나무에 달린 그네를 보고 아연실색합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은 쓰지 않는 타이어를 매달아서 아이들이 즐겁게 탈 수 있는, 그런 그네였거든요.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들 전문가들인데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할리가 절대 없다고요? 그럼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요? 이 그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만큼은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그네가 태어났을까요?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디자이너가 설사 제대로 된 그네를 디자인했었다고 하더라도 최종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또 이런 팀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즐거울 리도 없지요.
위 사진은 지난 주 출장길에 공항 화장실에서 사용한 변기입니다. 비닐로 된 변기 시트가 자동으로 나오고, 사용한 후에는 돌아서 들어가도록 만든, 위생에 신경 쓴 디자인입니다. 문제는 비닐로 된 변기 시트가 매끄럽게 돌아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앉는 부분이 평평하게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앉은 지 1분도 안되어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더군요. 화장실이 부족해서 오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엉덩이가 완전히 평평한 사람이 아니라면 엄청나게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의 엉덩이를 위한 변기가 아니라, 변기 시트를 위한 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의 제품이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위의 그네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위 그네 디자인 그림의 부제는 perils of a poor coordination입니다. 즉 제대로 되지 않은 협력이 가져오는 위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디자이너에게만 협력의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디자이너가 제품의 성격을 결정하고, 대략의 스펙을 정하며, -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 사용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디자이너들이야말로 전체 팀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각기 다른 부서의 입장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협력과 조율을 가능하게 하는 디자이너라면 디자인도 제대로 되고 디자인하는 일도 정말로 즐거워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