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방향 잡기
사자성어 四字成語는 주로 중국의 고사 등에서 유래된, 네 글자로 지혜로운 개념이나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지요. 복잡한 생각들도 한 칼에 정리해 주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 생활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성어라고 하면 대개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들이기 때문에 고리타분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소위 신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에서 들어온 디자인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디자인을 하다보면 종종 방향을 잃어버릴때가 있습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분석하고, 이런 저런 해결안을 만들다 보면, 그저 단순한 문제해결 수준에 그치게 되고, 내가 하는 디자인의 유니크한 특성을 잊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는 거지요.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열심히 해도 방향이 더 안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를 아무리 짜려고 해도 다 그저 그렇기도 하구요, 또 딱히 내 디자인에 대해서 설명할 말이 없기도 하지요. 이럴때 지혜를 모아놓은 사자성어를 들여다 보는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경박단소 (輕薄短小)
문자 그대로, 가볍고-얇고-짧고-작은 디자인을 말합니다. 주로 일본의 디자인이나 모바일 시대에 맞는 디자인 방향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무게가 가볍고, 두께가 얇으며, 길이가 짧고, 크기가 작은 것을 말합니다. 일본의 디자인이 세계를 휩쓸 때에는 이 ‘경박단소’의 힘이 위력을 나타낸 거지요.
일본 자동차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에도 경박단소의 원리가 적용된 자동차들이 투입되었는데, 사실, 미국인들의 기호에는 경박단소가 잘 맞지 않습니다. 한데 때마침 불어 온 오일쇼크가 미국 소비자들로 하여금 일본의 자동차들을 선택하도록 만든 거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미국 자동차들이 경박단소를 적용한 디자인을 시도했는데, 이게 잘 될리 없었습니다. Chevrolet이 “상당히” 작은 자동차로 개발한, 일본 자동차를 퇴치할 목적으로 개발한 Citation이라는 모델은 일반적인 미국의 자동차에 비하면 작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컸거든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모델이 되어서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일본 자동차의 기조가 경박단소라는 것을 알고 이를 어설프게 적용한 결과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말에는 ‘경박하다’라고 하면 사람이 가볍고 (귀가) 얇아서 쉽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짧고 작은 것보다는 비교적 큰 것을 선호합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단순한 것 보다는 뭔가 있어보이는 것에 더 눈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디자인은 종목을 막론하고 좀 복잡하고 때로는 분주합니다. 이럴 때, 특히 외국을 겨냥한 제품을 만들때에는 경박단소를 디자인의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스위스 시계 브랜드인 스와치 Swatch 가 만든 Skin은 경박단소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이름 그대로 피부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얇고 가볍지요. 휴대성이 중요한 모바일 기기들은 경박단소가 불문률입니다. 자동차에도 경박단소가 적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1957년 만들어진 피아트의 누오보 친케첸토 (혹은 피아트 누오보 500) 는 4인승의 승용차이면서도 500cc의 작은 엔진에 아주 콤팩트한 디자인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는 남자 두 명이 이 차들 앞뒤에서 들어서 옮기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가볍습니다. 개발된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길에서 볼 수 있고 마니아층도 형성하고 있는 명차입니다.
일반적으로 경박단소는 physical 한 제품의 특성을 설명할 때 사용되지만, UX UI 의 디자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담이 없고, 짧은 시간에 익히고 사용할 수 있으며, 덩치가 작은 시스템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제품의 UI, UX는 복잡합니다. 아마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를 좋아하는 국민성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중후장대 (重厚長大)
중후장대는 경박단소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무겁고-두껍고-길고-큰 디자인을 말합니다. 주로 예전의 미국 제품의 디자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미국의 기본 사고방식은 Think big 이기 때문입니다. 제품의 디자인에서도 묵직하고 든든한 것이 선호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성을 주고 가볍지 않은 믿음직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의 경우 고급차나 오프로드를 위한 자동차의 디자인의 방향에 적합합니다.
수년전 디트로이트에서 만들어진 샤이놀라 Shinola는 주 제품이 시계, 가죽가방, 자전거, 그리고 최근에는 턴테이블, 헤드폰 등으로 확대하면서 라이프 스타일 메이커로 미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샤이놀라의 키워드는 중후장대입니다. 묵직하고 투박합니다. 시계 페이스에 사용된 서체도 두껍고 무겁습니다. 얼마 전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동양 디자이너를 샤이놀라 매장에 데리고 갔는데 헤드폰을 써보더니 왜 이렇게 무거우냐고 하길래, 미국의 디자인 코드는 중후장대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가벼우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정조안락 (正早安樂)
경박단소와 중후장대가 디자인의 물질적 특성을 나타내는 거라고 하면, 정조안락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조안락은 정확한(정)-이른(조)-안전한(안)-즐거운(락)의 약자입니다. 경박단소의 디자인을 선호하든, 아니면 중후장대의 디자인에 마음이 가든 그런 것과는 별도로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디자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조안락은 다음과 같이 좀 더 넓게 풀어서 이해해도 좋습니다.
정 - 정확한 - 은 믿음직한, 디테일까지도 완벽한, 실수가 없는, 두리뭉실하지 않은, 신뢰가 가는 그러한 디자인입니다.
조 - 이른 - 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지루하지 않은, 번거롭지 않은, 경제적인 디자인입니다.
안 - 안전한 - 은 안정감을 주는, 숙련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노인과 어린이, 약자들도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락 - 즐거운 - 은 불편하지 않은, 기쁨을 주는, 따분하지 않은, 영감을 주는, 즐거움을 주는 디자인입니다.
사자성어는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네개의 글자로 뜻을 전하는 것을 사자성어라고 한다면 영어에도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KISS
“Keep It Simple, Stupid”, 즉 “심플하게 디자인해, 바보야” 정도의 뜻을 가진 KISS는 “바보야”라는 단어 때문에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자꾸만 뭔가를 더하려는 디자이너들의 일반적인 습관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디자인에 자꾸만 이것저것 더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KISS를 자주 상기해 보면 도움이 될겁니다.
KISS를 모토로 하는 디자인의 대표로는 독일의 Braun, 일본의 MUJI, 미국의 Apple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Braun은 전설적인 디자인 디렉터인 디터 람스 Dieter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절제미는 나중에 Apple, MUJI등이 교과서처럼 따라하는 KISS의 교본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Apple은 Braun의 디자인을 대놓고 답습 (또는 모방)을 했습니다.
https://www.apartmenttherapy.com/apple-design-doesnt-fall-far-from-brauns-tree-176668
MISS
MISS는 “Make It Sell, Stupid”, 즉 “팔릴 수 있는 디자인을 해, 바보야” 라는 뜻입니다. 예술성, 작품성만을 강조하는 디자이너들이 새겨야 할 말입니다.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니드를 무시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 하지 않지요. 또한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간과하는 원가-가격의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잘 팔리는 디자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잘 팔리지 않는 디자인은 절대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거든요.
새로운 제품이 탄생하는 타이밍도 MISS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타이밍을 잘 따라가거나 아니면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Swatch 시계는 손목시계가 단순한 시간을 말해주는 도구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즉 컬렉션의 대상이 되는 시점을 절묘하게 포착한 브랜드입니다. 정확성을 가장 큰 제품 차별화로 내세우던 스위스의 시계 산업이 다른 후발 메이커의 시계들도 정확해지면서 점차 시장에서의 설득력이 낮아지자 고급 시계의 대명사였던 스위스 시계를 컬렉션을 하고 싶은 시계로 바꾸어 버림으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MAYA
미국 산업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이몬드 로위 Raymond Loewy의 디자인 철학으로 잘 알려진 MAYA는 Most Advanced Yet Acceptable의 약어입니다. 즉, 최대한 앞선, 그러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을 말합니다. 단순히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눈 수준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진보적인 디자인을 제시하되,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과 모습으로 표현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저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상당히 어려운 이야깁니다. 두 가지의 서로 상충되는 것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앞선 것”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아직 보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말합니다. 또는 상상을 했더라도 감히 만들 생각은 하지도 못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것이 어려운 것은 우리는 모두 우리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 기술, 프로세스, 문화, 논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최대한 앞선 것”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윤복희씨를 기억하신다면, 또 그가 맞아야했던 계란을 기억하신다면 최대한 앞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최대한 앞선 것”들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로 현실로 불러낸 사람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지금은 화면의 반 이상을 키보드가 덮고 있는 스마트폰을 기억하기도 어려워졌지만, 10년전 키보드가 없는, “최대한 앞선 것”인 아이폰을 만든 용기있는 애플 덕분에 시원한 화면의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 겁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 디자인을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필요를 느낄 수 있고, 가치를 느낄 수 있고,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문화적으로도 포용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구매가 가능한 범위에 있는 디자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제품을 디자인하려면 일단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문화적 코드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사용자들이 얼마까지 부담할 수 있는지 하는 것 들을 알고나서 과연 얼마나 더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앞에 이야기한 윤복희씨의 미니스커트는 최대한 앞서기는 했는데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이슨이 디자인한 날개없는 선풍기, 막히지 않는 진공청소기, 막히지 않는 헤어 드라이어 등은 이전에 사례가 없는, 즉 최대한 앞선 디자인이면서, 그 가격을 부담할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으로 시작했습니다. 점차 모델을 다양화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용자층을 넓혀나간 사례입니다. 이 두 가지, 즉 최대한 앞선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