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수신 Mar 03. 2018

믿음: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키워드

믿음을 주는 디자이너로 살기

지난 글 - "노"가 입에 달린 디자이너로 살기의 말미에 Christopher Jones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면서 아래와 같이 적었었습니다. 아래 파란색의 문장들은 그 글의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John Christopher Jones가 쓴 Design Methods (1970년)의 처음은 "What is designing?"이라는 챕터로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Jones 본인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정의에 비해서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물론 번역도 좀 어렵습니다. "The performing of a very complicated act of faith." 10년 뒤 Bryan Lawson도 자신의 저서 How Designers Think (1980년)에서 디자인 행위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Jones의 디자인 작업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였습니다.


"상당히 복잡한 믿음(에 근거한) 일을 하는 것"정도로 번역을 할 수 있는 이 말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믿음'이라는 단어는 거의 들어보기 어렵습니다. 디자인 작업이 예쁘고 쓰기 좋은 물건을 만드는 거라면 굳이 이렇게 어려운 표현을 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디자인 작업은 설계나 공정관리, 마케팅 등의 분야와는 달리, 소위 답이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 디자인을 선택하느냐 아니냐의 결정에는 그 디자이너와 디자인 작업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디자이너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디자인하고, 그 디자인이 채택되어 기업에도, 사람들에게도, 또 사회에도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물건이 되도록 하는 사람인데, 내 디자인 테이블에서 사람들의 손에 가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내 디자인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결코 물건으로의 생명을 얻지 못한 디자인으로 남게 될 겁니다. 디자인의 우수성 여부를 수식으로 계산해 낼 수 없다 보니 결국은 신뢰가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려면 지식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고, 다른 분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쯤 되면 매사에 '댓글'을 달아도 내 회사가, 내 클라이언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상사, 클라이언트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내 디자인을 주기 아까운 존재들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이 글에에서 어떠한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상적이기는 해도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또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 해서, 과연 믿음을 주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여기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이너가 그저 자신과 자신이 한 디자인을 믿어달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근거없는 자신감에만 차 있어도 곤란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고집과 아집에 가득찬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실력은 없이 말로만 모든 걸 다하는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구요. 믿음을 주는 디자이너라면 디자인 작업에 필요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고, 다른 분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사나 클라이언트에 대한 충성도, 팀에 대한 조직원으로서의 소속감 등도 중요합니다. 늘 새로운 것을 제시하면서도 또 설득력까지 있는 디자이너라면 신뢰가 갈겁니다. 마지막 시간에 쫒기는 모습을 보이기 보다 프로액티브한 자세를 가진 디자이너라면 더욱 믿음이 갈 겁니다. 중요한 프로젝트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여담이지만, 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할 때 디자인 실기 실력이 가장 뛰어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포트폴리오를 들고 오면 다들 모여서 그 친구 작업을 보느라고 넋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대단했습니다. 아무 설명없이 스케치와 렌더링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설득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렌더링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문제는, 이 친구가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때마다 반드시 늦게, 헐레벌떡거리면서 오는 겁니다. 때로는 다 끝나고 교수가 간 뒤에 오기도 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후, RCA에서의 행사에서 만났는데, 아직도 변변한 직장이 없이 다른 디자이너들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아까운 인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믿을 수 없는 디자이너한테 일을 맡길 회사는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몰라도.


디자이너는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참 많습니다. 디자인이 아닌 다른 일들도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많겠지요. 하지만 - 제가 디자이너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 디자이너는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미국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Raymond Lowey가 좋은 디자인을 Most Advanced Yet Acceptable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번역하자면 최대한 진보적이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말이지요. 즉, 좋은 디자인이라면 사람들 (다른 디자이너들 포함)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보적이면서도 사람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 포함)이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이라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MAYA라고도 부르는 이 생각은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도전이 되는 원칙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디자인을 하려면, 첫째,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익숙한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imaginationcourage가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대한 ‘부정’이 필요하지요. 지금 잘 되고 잘 팔리는 디자인을 부정해야만 그 것을 넘는 디자인이 나올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즉, ‘안전한 이불’ 속을 벗어나서 모든 것을 물구나무서서 보듯이 해야 합니다. 이불속이 안전할지는 몰라도 디자이너가 있을 곳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쓴 이전의 블로그들이 도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Most advanced 라고 할 만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 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합니다. 다른 잘 나가는 제품의 디자인을 너무 쳐다보지 말고 말이죠. 


두번째로는 이 advance한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앞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imagination이라면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realizationknowledge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야 합니다. 구현을 할 수 있는 기술적인, 경제적인 범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속한 회사나 클라이언트의 이해와도 맞는 지점이 있는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문화적으로 포용이 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고려한 디자인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되는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합니다. 


1949년 Time지 커버 인물인 Lowey


1949년 10월 31일자 TIME의 커버를 장식한 Lowey의 사진 아래붙은 설명이 Lowey가 믿음을 주는 디자이너라는 것을 한마지로 정리합니다 - "He streamlines the sales curve." Lowey가 디자인한 기차 등 많은 제품에 Streamline, 즉 유선형이 많이 사용된 것과,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의 시장에서의 성공을 한데 묶어서 표현한 말이지요.


MAYA = Imagination+Courage + Realization+Knowledge


이 두 가지에 능숙한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신뢰할 겁니다. 아니, 신뢰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디자이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늘 귀를 기울일 겁니다. 디자이너를 ‘을’로 보는 ‘갑’들도 말이지요. 안 들으면 손해니까. 이런 디자이너가 말하는 것, 보여주는 것이라면 설사 이해가 안되더라도, 자기 생각과 다르고, 자기가 지시한 내용과 다르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할 겁니다. 그런 장면 참 많이 보았습니다. 


역시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것, 할 줄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쉬운 직업이 아니지요. 하지만 Most Advanced Yet Acceptable 한 디자인을 할 때의 기쁨과 보람은 디자이너들에게 주어지는 축복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