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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Apr 08. 2018

디자인: 커피 만들기

디자인을 하려면 그 디자인을 사용할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

학생으로, 디자이너로, 또 대학 교수로 디자인을 해 온 지 참 오래되었건만, 디자인이 과연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아니,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들만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디자인이 모든 사람의 화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 과정에 참여도 하게 된 지금은 디자인이란 뭔가에 대한 인식이 더 넓어지고 다양해져서, 마치 더 아는 만큼 더 모르게 되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소경들이 "보러"간 코끼리. 디자인은 참 코끼리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디자인이란, 마치 소경들이 보러 간 코끼리와 같아서, 다리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통나무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큰 나뭇잎 같다고 하고, 또 꼬리를 만진 이는 뱀 같다고 했다는 이야기처럼, 그 전체를 한 마디로 아우르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디자인을 단순히 예쁜 물건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디자인의 극히 작은 한 기능, 마치 코끼리 다리의 발톱 하나를 가지고 코끼리 전체를 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정의를 내린 사람들은 아주 많은데, 그 정의들의 대부분은 디자인을 기계적으로 표현하거나 (예를 들면 "The optimum solution to the sum of the true needs of a particular set of circumstances". - Matchett) 아니면 철학적으로 표현한 (예를 들면 "Perposive, functional, information-driven action." - Esherick) 같은 것 들이고, 어떤 것들은 극단적으로 철학적 (예를 들면 "Making dreams come true." - Koberg) 이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 앞의 블로그에서도 인용했던 "The performing of a very complicated act of faith" (Jones) 도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예전에 디자인을 처음 배운 학교의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Industrial Design은 Problem solving activity라고 설명하신 말씀이 4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디자인이 대개 예쁘게 그리고 잘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니, 디자인이라는 용어도 아직 생소하던 시절에 디자인에 대한 이런 정의는, 물론 책에서 인용하신 것이었겠지만 -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디자이너들은 이것을 디자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의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자인이란 문제 해결 행위라는 이 말은 얼핏 능동적인 것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상당히 수동적인 정의입니다. 왜냐면 문제가 없으면 디자인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되거든요. 미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If it ain't broke, don't fix it", 즉 "망가지지 않았으면 (굳이) 고치지 마라"는 것 역시 상당히 수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많아져서, 디자인은 문제를 단순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는 행위라는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수동적인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발견이란 고쳐지거나 개선되어야 할 것, 즉 뭔가가 잘 안 되는 것을 찾는다는 뜻인데, 꼭 고치거나 개선되어야 할 것이 있어야만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Denys Lasdun은 디자이너 (또는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서, "Our job is to give the client... not what he wants but what he nevereven dreamt he wanted"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디자이너란 사람들 (또는 클라이언트)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거지요. 상당히 능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Bryan Lawson이 쓴 How Designers Think라는 책에서 읽은 이 한 마디가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참고로 Lawson은 1980년에 쓴 이 책에서 이미 Design Thinking 이야기를 상세하게 하고 있습니다.


How Designer Think 책에 인용된 Lasdun의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글. 지금 보니 밑줄까지 쳤었네요.




10년간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Theory of Design 디자인 론 수업을 가르치면서 얻은 수확이라면 디자인은 커피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디자인이란 이러 이런 한 것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이미 디자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하고 또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디자이너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거든요.


따라서 내 디자인 론 수업의 첫 시간은 언제나 '디자인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먼저 학생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의 정의를 물어봅니다. '선행학습'을 해 온 몇몇 친구들은 책에서 읽은 대로 '디자인은 문제 해결 행위 Design is problem solving activity'라는 답을 합니다. 기계적인 관점의 디자인을 보는 시각이지요. 어떤 아이들은 '디자인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 Design beautifies our environment'라고 합니다. 디자인을 보는 예술적인 시각입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굿 디자인은 굿 비즈니스'라고도 합니다. 디자인에 대한 상업적인 관점이지요.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디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완전한 답은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디자인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깊게 하면 '수박은 녹색' 같은 상투적인 답을 하지 않게 됩니다.

몇몇 학생들이 답변을 하고 나면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정의를 제시해 줍니다 - 디자인은 커피 만들기. 125명이 듣는 대형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이 눈이 커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거든요. 내 설명이 끝난 후 학생들의 '댓글'을 듣고 숙제를 내줍니다. 일주일 동안 각 개인이 생각하는  -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 디자인의 정의를 가져와서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겁니다. 이 친구들이 발표하는 디자인의 정의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시각들이 많거든요. 오늘은 내가 제시했던 디자인의 정의 - 디자인은 커피 만들기 - 를 적어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아이들이 가져온 디자인의 정의들도 다음에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인: 커피 만들기

디자인이란 커피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커피는 기본적으로 말하면 카페인을 물에 탄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커피 원두, 볶는 방법, 수질, 온도, 기구, 장소, 방법, 심지어 커피 잔에 따라서 커피 맛이 달라지기는 합니다만, 커피는 어쨌든 카페인을 물에 탄 것입니다. 커피 만드는 방법을 잘 배우고 커피를 자주 만들다 보면 꽤 맛있는 커피를 만들게 될 수 있을 겁니다. 저같이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이미 전문가들이 잘 연구해서 배합해 놓은 프리믹스 커피를 마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기계적인" 점들만 갖추면 될까요?



광고에서 종종 보듯이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음료 이상의 것이지요. 새로 알게 된 친구가 우리 집에 초대했는데 그 친구와 같이 마실 커피를 만든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록 내가 실력 있는 바리스타는 아닐지라도, 그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커피를 만들 겁니다.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의 정도에 따라 더 많은 정성을 들이게 될 것이고, 정성을 들여서 만드는 모습을 본 그 친구도 이 커피를 즐기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커피 자체의 맛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의 정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더 좋은 커피를 만들려면 좋은 커피 원두, 물의 온도, 커피를 담는 커피잔의 디자인, 그리고 커피를 잘 만드는 실력, 모두가 중요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도 이런 것들만 있다면 꽤 괜찮은 커피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빠졌다면 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집밥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이유입니다. 평생 그 맛에 익숙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정성을 다른 사람이 쉽게 대체할 수는 없거든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만으로 좋은 커피가 만들어질리는 만무합니다. 정말로 배려한다면 "기계적인" 부분들도 잘 해야만 합니다. 전에 신시내티 대학교의 한 학생이 사회적 디자인을 주도하던 H Project의 활동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인턴을 H Project에 가서 하겠다고 해서 말린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는 디자인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역할을 하는 현장에 있고 싶어 했지만, 아직 디자인 실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말린 거지요. 영화 Spyder Man의 명대사,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를 뒤집어서, "Great Responsibility should come from great power", 즉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도우려면 디자인을 잘 해야 해"라고 했습니다. 일단 "기계적인" 디자인 실력이 있어야 남을 배려할 수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민폐 디자인만 만들게 됩니다.



오디오를 디자인한다고 해 볼까요. 오디오에 들어갈 전자 부품과 기계부품, 그리고 이들을 담을 수 있는 케이스를 만들면 디자인이 완성됩니다. 사실 이런 디자인은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것처럼. 디자인을 더 공부했거나 전자제품의 디자인 경험이 많다면 더 나은 오디오를 디자인할 수 있을 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통해서 디자인하는 것보다 내가 디자인하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또 자동차를 고치거나, 요리를 하는 사람의 즐거움을 상상하면서 디자인을 하면 훨씬 더 아름다운 디자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만들어주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기아 세피아 디자인 초기의 스케치. 다양한 차체로의 변형 연구. 1987년


자동차같이 복잡한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 그리는 법을 배우고, 각 부품에 대한 지식이 있고, 또 생산 방법 등을 공부하면 자동차를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좋은 디자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잠도 안 자고 자동차를 그리고 모델을 만드는 것을 익히고, 또 바늘구멍 같은 경쟁을 뚫고 자동차 회사에 취직한 뒤, 더 경쟁적인 환경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왜 길에 나가면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의 abc도 모르는 것 같은, 심지어는 불편하기까지 한 디자인의 자동차들이 그리도 많은 걸까요? 커피를 만드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했는데, 정작 커피를 마실 사람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제대로 디자인되지 못한 제품은 그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하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서 사람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또는 배려하는 마음은 충분한데, 기계적인 디자인 실력이 약해서 일 수도 있고요.


세피아를 디자인하던 당시 일하는 모습. Car Styline지 69호.


사실 '디자인은 커피 만들기'라는 생각은 예전에 기아자동차에서 세피아를 디자인할 때 (1987-1992) 경험했던 일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때까지 다른 회사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를 생산하던 기아자동차의 최초 고유모델일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로 한국 디자이너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독자모델이라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던 거지요. 저는 대학을 갓 졸업한 디자이너 한 명과 같이 외장 디자인을 맡았었습니다. 사진에 까만 티셔츠. 당시에는 컴퓨터는 사무용으로만 쓰이고, 디자인 작업에는 아직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 손으로 그리고 손으로 만들었었지요. 디자인 초기에서 양상까지 5년 반이 걸렸었습니다.


자동차 전체를 성공적으로 디자인해 낸 것보다도 더 보람찼던 것은 플라스틱 휠 커버의 디자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급 차종에는 알루미늄 휠이 적용되고 저가 모델에는 철제 휠을 덮는 플라스틱 휠 커버가 적용되지요. 플라스틱 휠 커버는 사출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공정의 특징 상 금형이 열리는 파팅 라인 parting line이 생기게 됩니다. 이 파팅 라인은 날카로운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타이어에 공기를 넣기 위해서 휠 커버를 벗기려고 힘을 주다 보면 손가락 안쪽이 꽤 아프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피아 휠 커버 단면. 일반적인 휠 커버의 파팅 라인(왼쪽)과 2mm 이동한 파팅 라인


이 파팅 라인을 2mm 이동해서 휠 커버의 마무리를 둥글게 디자인하였는데, 그 이유는 손가락 안쪽에 닿는 부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파팅 라인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 파팅 라인을 모서리에서 좀 떨어진 것으로 옮기면 날카롭게 각이 진 부분이 손가락을  누르는 것을 피할 수 있어서 불쾌감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출 금형의 제작이 좀 까다로워 지기 때문에 휠 커버 담당 엔지니어와 제작 업체를 설득해야 했는데, 디자인하는 것보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더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작은 디테일은 잘 보이지도 않고 알아주는 사람도 있을 리 없지요. 하지만 18년 동안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동안 만든 수많은 렌더링들보다는 자동차를 사용하는 사람들 배려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는 기억들입니다. 수십 년 후 대학에서 디자인은 커피를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이때의 기억 덕분입니다.

2013년 12월, 신시내티 대학에서의 디자인 론 마지막 수업 후


디자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그러나 잘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 - 디자인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 을 가르치는 학교가 늘어나면 더 좋은 디자인이 가득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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