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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Feb 19. 2018

"노"가 입에 달린 디자이너로 살기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로 살기

좋은 디자이너: "노"가 입에 달린 디자이너라는 글을 쓰고 보니 제가 읽어봐도 좀 딱딱합니다. 너무 가르치는 분위기 이기도 하고, 또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말씀하신 분도 계셨구요. 미국, 독일, 중국, 한국 등 몇몇 대학에서 유사한 주제로 특강을 할 때에도 듣는 학생들의 눈에 걱정이 그득합니다. 그러다 직장이라도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지요. 좋은 디자이너라기 보다는 "힘들게 사는 디자이너"가 될 판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쓰겠습니다. "노"가 입에 달린 디자이너로 산다는게 과연 어떤 것인가.


https://brunch.co.kr/@sooshinchoi/9


"노"가 입에 달린 디자이너 - 라는 뜻은 사실 "매사에 딴지를 거는 디자이너"라는 뜻은 아닙니다. 상사나 클라이언트, 그리고 다른 디자이너들도 그런 디자이너와 같이 일하고 싶어 할 리가 없지요. 나라도 그런 디자이너와는 일하기가 참 어려울 겁니다. 또 나 자신을 언제나 부정하다 보면 불만에 가득차거나 너무 까칠한 디자이너가 될테구요. 본인도 힘들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윗사람, 클라이언트, 교수님 등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수용한다면 이미 디자이너가 아닌 겁니다. 직장인, 외주업체, 그리고 학생으로서 큰 탈 없이 살아갈 수는 있겠지요. 만일 큰 탈 없이 살 수 있는 직업을 찾는다면 디자인 말고 다른 적합한 것이 아주 많이 있을 겁니다.


디자이너 아무개로 기억되려면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살기 - 디자이너에게 직장이나 사업은 필요합니다. 단순히 월급을 받거나 수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돈 벌기 위해서 일하다. 영어로는 work to pay the bill이라고 합니다), 그 회사나 클라이언트를 통해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디자인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는 소위 '삼성 맨', '현대 인' 같은 식으로 직원들을 부르고, 본인들도 자신들을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회사로서는 직원들의 충성심을 요구한 것이고 본인들로서는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긍심을 표현한 거지요. 그 '삼성 맨', '현대 인' 등등이 자의 또는 타의로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그 타이틀은 사라집니다. 이런 사라질 수도 있는 타이틀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직장의 상사가 주는, 때로는 나쁜 혹은 추한 지시에 "노"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 특히 나보다 지위가 높은 얼굴을 보면서 "노"하기 어려운 문화 환경이니까 그 "노기"가 없어지는게 아니라 쌓여서 다른 곳에서 폭발합니다. 건설적인 댓글 보다는 파괴적인 악플이 훨씬 더 많은 이유도 이런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은 괜히 나온게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I disagree" 라는 말을 위아래 구분없이 쓰고,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나도 아래 사람이 회의자리에서 나를 보면서 "I don't agree" 하는 바람에 잠시 열이 올라오는 자신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말뜻은 "난 너에게 동의할 수 없어"가 아니라, "난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라는 거니까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는거 거든요.


예를 들어, Apple iPhone이나 Dyson 청소기의 시장 영향력이 커지니까 그렇게 생긴 스마트폰이나 청소기를 디자인하라는 지시에 "예스"를 한다면 당장은 직장인으로서의 수명이 길어질 수 있지만, 정작 회사의 운명이 걸린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 중요한 프로젝트를 그런 디자이너에게 맡길 리 없습니다. 게다가 인원을 줄여야 한다면 가장 먼저 내 보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직장인으로서 쓸만한지는 몰라도 디자이너로서의 가치는 별로라는 걸 회사도 상사도 잘 알고 있거든요.



직장인이 아니라 디자이너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한 말이지만 디자인 실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전에 일하던 K자동차 회사 디자인 연구소에 유난히 "직장인"으로 살던 친구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디자인 실력은 후배들보다도 못한데 직장인으로서의 생존력 하나로 버틴 거지요. 나름 잘 나가는 것도 같았습니다. 제가 K사를 나온 몇 년 후, 회사가 H사에 합병되자 조만간 내보내 지더군요. 또 다른 하나는 질긴 생존력으로 버티다가 한참 후배들이 중역으로 다 진급한 후에 중역 대우 타이틀을 달고 나서는 오래 안되어 회사를 나오게 되더군요. "OO맨 아무개" 보다는 "디자이너 아무개"로 살아야 합니다.

 

직장인으로서 살아가는게 나쁘다는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조금 덧붙이겠습니다. 내 직장과 클라이언트에 대한 로열티, 즉 충성도는 사실 상당히 중요하니까요. 이 글 뒷 부분에 나올 '믿음'을 갖게 하는데에도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만 산다는 뜻은, 이미 충분히 이해하셨듯이, 직장인으로 '살아남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거는걸 말하는 겁니다


2. 날마다 젊게 살기 - 이거, 어렵습니다. 날마다 젊게 산다는 것은 유행따라 젊어 보이는 옷 입고 머리를 염색하고 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에 내가 알던 것 하던 방식을 버리는 거지요. "그런 건 이렇게 하는 거야"하는 생각을 버리고 늘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겁니다. 이륳게 하면 언제나 젊게 살 수 있는데, 문제는 이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물에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기는 싫어하면서도 막상 별 쓸모없는 옛 습관에 젖어 사는 자신은 잘 모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다 꼰대"가 되는 거지요. 대학에 이런 교수들이 많습니다. 3, 4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3, 40년간 같은 것 가르치는 사람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교수들에게 배울 거 별로 없다는거, 어린 학생들도 잘 압니다. 이런 "전문가"들, 기업에도 많습니다. 경력이 오래된 전문가들에게서 유연하고 신선한 사고방식을 찾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일수록 예전에 통하던 방법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별 방법없이 꼰대 디자이너 되는 겁니다.


한동안 세계 가전업계의 왕이던 GE Appliances는 2014년 Electrolux에 팔려가는가 싶더니 2016년 이름도 없던 중국의 Haier에 팔려가는 더 큰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그 일이 있기 전 GE Appliances를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20년 정도씩 일한 "가전 전문가" 디자인 디렉터들의 생각은 내년의 냉장고 표면 재료로는 뭘 쓸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내가 냉장고를 커다란 아이스 박스 정도로 보지 말고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는 허브로 봐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입이 부르트게 이야기해 주어도 소용이 없더니 결국은 외국회사들의 하청공장이던 회사에게 팔린 겁니다. GE Appliances사도, 그 회사의 디자이너들도 날마다 젊게 살기를 하지 않은 결과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인수되기 한 두해 전부터는 "Made In America Again" 이라는 구호 아래 전에 중국에서 하던 외주 생산을 중단하고 공장을 미국으로 다시 가지고 오는 등 요란을 떨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중국 메이커의 미국 생산공장이 된 것입니다.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GE Appliances 공장. Haier 계열회사라는 표지가 선명하다.


회사 내의 조직으로서의 디자이너이든 용역사로서의 디자이너이든 날마다 더 젊어지기는 가장 디자이너 다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젊어지기를 멈춘 디자이너는 그때부터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봐도 됩니다.


3.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디자이너 자격 갖추기: 실력은 별로 없으면서 매사에 "노"라고 하면 우스워집니다.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서 지시나 의견에 "댓글"을 달면 딴지를 거는 사람으로 밖에 안 보이는 거지요.



John Christopher Jones가 쓴 Design Methods (1970년)의 처음은 "What is designing?"이라는 챕터로 시작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Jones 본인의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정의에 비해서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물론 번역도 좀 어렵습니다. "The performing of a very complicated act of faith." 10년 뒤 Bryan Lawson도 자신의 저서 How Designers Think (1980년)에서 디자인 행위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Jones의 디자인 작업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였습니다.


"상당히 복잡한 믿음(에 근거한) 일을 하는 것"정도로 번역을 할 수 있는 이 말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믿음'이라는 단어는 거의 들어보기 어렵습니다. 디자인 작업이 예쁘고 쓰기 좋은 물건을 만드는 거라면 굳이 이렇게 어려운 표현을 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디자인 작업은 설계나 공정관리, 마케팅 등의 분야와는 달리, 소위 답이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 디자인을 선택하느냐 아니냐의 결정에는 그 디자이너와 디자인 작업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가르칠 적에 운용했던 Designnovation Studio에서의 작업 장면


(제대로 된) 디자이너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디자인하고, 그 디자인이 채택되어 기업에도, 사람들에게도, 또 사회에도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물건이 되도록 하는 사람인데, 내 디자인 테이블에서 사람들의 손에 가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내 디자인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결코 물건으로의 생명을 얻지 못한 디자인으로 남게 될 겁니다. 디자인의 우수성 여부를 수식으로 계산해 낼 수 없다 보니 결국은 신뢰가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려면 지식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고, 다른 분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쯤 되면 매사에 '댓글'을 달아도 내 회사가, 내 클라이언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상사, 클라이언트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내 디자인을 주기 아까운 존재들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좀 더 현실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는데, 더 마음만 복잡해졌다고 느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주저말고 "댓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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