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정확히는 디자이너와 프랭크 슬레이드
디자이너들의 롤 모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대개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님들이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성공한 디자이너들이겠지요. 저는 영화 여인의 향기 Scent of a Woman에서 그 모델을 찾았습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 슬레이드 Frank Slade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알 파치노, 즉 프랭크는 디자이너가 아니고, 그 영화도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랭크는 앞이 안 보이는 퇴역 육군 대령입니다. 성격도 괴팍하고, 독선적이고, 쉴 새 없이 떠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무안하고 기분나쁘게 만드는 것이 취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 조차 가까이하기 싫어합니다.
명문 기숙 고등학교 학생인 찰리가 추수감사절 동안 여행을 떠나야 하는 식구들 대신 뒷 방에서 시가만 피워대던 프랭크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식구들이 떠나자마자 프랭크는 영문도 모르는 찰리를 데리고 맨해튼으로 가서 아스토리아 왈도프 호텔에 묵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Scene 1 - Tango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의 탱고 장면입니다. 찰리를 데리고 간 고급 식당에서 프랭크는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아서 남자 친구를 기다리던 도나 Donna에게서 풍기는 향기 (이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인 이유입니다)에 이끌려 합석을 하게 됩니다. 예상치 않은 두 남자와 합석을 하게 되어 어색하게 된 도나에게 프랭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말로 생뚱맞게) 탱고를 추겠느냐고 묻습니다. 마침 식당의 악단이 탱고를 연주하고 있었거든요. 도나는 예전에 배우고는 싶었지만, 남자 친구가 반대를 해서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프랭크는 여기서 탱고를 배워보겠느냐고 묻습니다. 깜짝 놀라는 도나를 결국 설득해서 식당 한가운데 공간으로 가서 Por Una Cabeza에 맞추어 탱고를 추기 시작합니다. (제 스마트 폰의 링 톤도 Por Una Cabeza입니다)
얼떨결에 넓은 식당 한가운데서 전혀 모르는 남자와 탱고를 추게 된 도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탱고를 배운 적도 없으니 더 불안했었겠지요. 도나의 얼굴에는 그 불안함이 역력히 나타납니다. 탱고가 시작이 되고 프랭크의 능숙한 리드에 맞추어 약간의 즐거움이 얼굴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주변의 시선도 신경이 쓰이고요.
하지만 스탭이 이어질수록 멋진 상대와의 탱고의 즐거움에 빠져들고 도나의 얼굴에도 그 기쁨이 넘쳐납니다. 이윽고 음악이 멈추고 모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자 남자 친구가 들어오고 도나를 데리고 다른 약속 장소로 나갑니다. “어쩔 수 없이” 남자 친구를 따라 나가는 도나의 얼굴은 프랭크를 떠나지 못합니다.
프랭크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1. 탁월한 감각 - 물론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프랭크의 감각은 엄청납니다.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완벽한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추구에서도 알 수 있지만, 특히 도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좀 떨어진 곳에서도 맡아냅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는 그 향기가 Ogilvie Sister's Soap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깜짝 놀란 도나가 그 비누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할머니가 작년에 선물로 준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프랭크는 그 할머니가 멋진 분일 거라고, 사귀고 싶다고 농담을 합니다. 이 탁월한 감각을 보여줌으로써 도나로 하여금 프랭크를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2. 호기심 - 프랭크가 망설이는 찰리를 데리고 도나한테로 가는 장면에서 “The day we stop lookin', Charlie, is the day we die.”라고 말합니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찰리,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끝이라는 거지요.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호기심은 마치 죽은 나무를 살리는 생명수 한 방울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디자인 기술이 좋고 지식이 풍부해도 아직 본 적 없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없다면 그저 성능 좋은 복사기 같을 뿐입니다.
3. 철저한 연구 - 도나에게 탱고를 추겠냐고 묻는 장면에서 도나가 탱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반대하는 남자 친구 때문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디자인으로 말한다면 사용자의 마음속에 숨겨 둔 욕망을 발굴해 내는 디자인 연구 과정을 제대로 밟은 겁니다. 이 과정에서 도나가 탱고를 배운 적이 없다는 fact 외에도 남자 친구의 성향과 그 때문에 원하는 것을 접어두어야 했던 도나의 마음 등을 이해를 한 것도 중요합니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인 연구과정에서 알게 된 것 그 속을 들여다보려는 자세와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4. 설득력 - 도나에게 탱고를 가르쳐줄 테니 배우겠느냐고 묻자 도나는 "여기서?" 하면서 망설임 + 부정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운 적도 없는 탱고를 고급 레스토랑의 홀에서 배우면서 춘다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아니지요. 만일 프랭크가 여기서 접어버렸다면 탱고 이야기는 그저 작업을 거는 멘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테고. 이야기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되어 버렸겠지요.
5. 완벽한 기술 - 그야말로 생뚱맞게 처음 보는 남자에 설득당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생전 처음 탱고를 추게 된 도나의 마음에는 즐거움과 기대는 전혀 없고 잘 못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뿐이었을 겁니다. 탱고를 처음 추기 시작할 때, 그리고 한동안 도나의 얼굴에는 이런 걱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완벽하고 부드러운 리드를 따라가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뀝니다. 도나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레스토랑의 손님들의 표정에도 부러움이 넘쳐납니다. 만일 프랭크의 스텝이 어설펐거나 부드럽지 않았다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지요.
6.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주는 능력 - 디자이너는 기대한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Denys Lasdun이 이야기 한대로,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한다고 꿈꾸지도 않았던 것을 주는 겁니다. "Our job is to give the client.. not what he wants but what he never even dreamt he wanted." 프랭크는 도나가 원한 것을 해 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생각지도 않았던 기쁨을 맛보게 해 줍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 말한 감각, 호기심, 연구, 설득력, 그리고 완벽한 기술 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2rqe61bFs
Scene 2 - Baird School Disciplinary Hearing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기숙학교인 Baird High School의 교장 (교만하고 이사회에만 아부하는 퍼스낼리티)이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이사회가 선물해준 자신의 새 차에 해코지를 한 세 학생들을 벌 주기 위해 그 모의 과정을 본 찰리와 그의 동급생 죠지를 모든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인 청문회에서 "신문"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이 교활한 교장은 세 학생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지만 그들을 벌주지 않습니다. 죠지가 그 학생들의 모의 과정을 분명히 보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부자 학부모인 관계로 끝까지 추궁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잣집 출신이 아닌, 먼 오레곤에서 온 학생인 찰리를 이상한 논리로 거짓말쟁이로 몰고, 모든 책임을 물어 퇴학시키려 합니다. 정말로 이상한 전개 과정이지요.
한데, 맨해튼에서 찰리와 같이 며칠을 보낸 프랭크가 참석하지 못한 찰리의 아버지 친구라면서 뜬금없이 등장하고, 찰리의 변호를 하면서 벌어지는 장면은 모든 디자이너들이 꼭 보았으면 합니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Mr. Sims는 찰리의 성이고, Mr. Slade는 프랭크의 성, 그리고 Trask는 교장의 이름입니다.
Trask: Mr. Sims, you are a cover-up artist and you are a liar.
Slade: But not a snitch!
Trask: Excuse me?
Slade: No, I don't think I will. This is such a crock of shit.
Trask: Mr. Slade, you will watch your language. You are at the Baird School now, not a barracks. Mr. Sims, I will give you one final opportunity to speak up.
Slade: Mr. Sims doesn't want it. He doesn't need to labeled, "...still worthy of being a 'Baird Man.'" What the hell is that? What is your motto here? "Boys, inform on your classmates, save your hide. Anything short of that we're gonna burn you at the stake?" Well, gentlemen. When the shit hits the fan, some guys run and some guys stay. Here's Charlie--facing the fire, and there's George--hiding in big Daddy's pocket. And what are you doin'? You're gonna reward George, and destroy Charlie.
Trask: Are you finished, Mr. Slade?
Slade: No, I'm just gettin' warmed up. Now I don't know who went to this place--William Howard Taft, William Jennings Bryan, William Tell--whoever. Their spirit is dead; if they ever had one, it's gone. You're building a rat ship here. A vessel for sea going snitches. And if you think you're preparing these minnows, for manhood you better think again. Because I say you are killing the very spirit this institution proclaims it instills. What a sham! What kind of show you guys puttin' on here today? I mean, the only class in this act is sittin' next to me. And I say, this boy's soul is intact. It's non-negotiable. You know how I know? Because someone here--I'm not gonna say who--offered to buy it. Only Charlie here wasn't selling.
Trask: Sir, you are out of order!
Slade: Out of order, I'll show you out of order! You don't know what out of order is, Mr.Trask! I'd show you but I'm too old, I'm too tired, and I'm too fuckin' blind. If I were the man I was five years ago I'd take a flame-thrower to this place!! Out of order, who the hell do you think you're talking to? I've been around, you know? There was a time I could see. And I have seen, boys like these, younger than these, their arms torn out, their legs ripped off. But there is nothin' like the sight of an amputated spirit, there is no prosthetic for that. You think you're merely sending this splendid foot-soldier back home to Oregon with his tail between his legs, but I say that you are executing his soul! And why? Because he's not a Baird man. Baird men, you hurt this boy, you're going to be Baird Bums, the lot of ya. And Harry, Jimmy, Trent, wherever you are out there, fuck you too.
Trask: Stand down Mr. Slade!
Slade: I'm not finished! Now as I came in here, I heard those words...cradle of leadership. Well, when the bough breaks, the cradle will fall. And it has fallen here, it has fallen! Makers of men, creators of leaders, be careful what kind of leaders you're producing here. I don't know if Charlie's silence here today is right or wrong; I'm no judge or jury. But I can tell you this: he won't sell anybody out to buy his future! And that my friends is called integrity, that's called courage. Now that's the stuff leaders should be made of. (pause) Now I have come to the crossroads in my life. I always knew what the right path was. Without exception, I knew. But I never took it, you know why? It was too damn hard. Now here's Charlie; he's come to the crossroads. He has chosen a path, it's the right path. It's a path made of principle, that leads to character. Let him continue on his journey. You hold this boy's future in your hands, committee! It's a valuable future. Believe me! Don't destroy...protect it...embrace it. It's gonna make you proud some day...I promise you.
https://www.youtube.com/watch?v=RUE4v1rUpSM
소위 리더들의 산실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상급 기숙학교인 Baird School을 강조하는 교장에 대해 프랭크는 진정한 리더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를 강한 어조로 가르쳐 줍니다.
1. Integrity: 진실함, 온전함, 순전함 등으로 설명되는 이 단어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자이너들, 특히 기업에 속한 디자이너나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하는 디자이너들은 옳은 디자인과 착한 디자인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있을 겁니다. 옳은 디자인이란 모든 사람들을 - 사용자, 기업, 등 그 디자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사람들 - 이롭게 하는 디자인입니다. 환경도 물론 포함되지요. 착한 디자인이란 디자인을 의뢰한 회사나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그대로의 디자인을 해 주는 것인데 (말 잘 듣는 디자이너가 한 디자인), 종종 옳은 디자인과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성공적인 판매를 위해서 눈길을 끌고 큼지막한 패키지는 그만큼의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딱딱한 비닐로 만드는 패키지는 이 패키지를 가위나 손으로 열다가 다치기 십상입니다 (wikipedia에서 wrap rage를 검색해 보면 이런 종류의 패키지가 끼치는 해악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2. Courage: 용기, 담대함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반대와 난관, 두려움과 위험을 뚫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디자인, 즉 옳은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상사나 클라이언트의 요구, 또는 스스로의 나태함등에 그 의지가 꺾이는 디자이너들과 그 결과물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만날 때 단순한 오기나 고집이 아니라, 사람들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용기 만으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가 보는 옳은 디자인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착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상대를 설득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도 같이 필요합니다.
디자이너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I am just a designer"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와 역할을 낮게 보는 겁니다. 디자이너들이야 말로 - 분야에 관계없이 - 이 사회의 리더라는 것을 자부심 있게 인정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리더들에게는 능력과 스펙뿐만 아니라, integrity과 courage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