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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Apr 11. 2018

디자이너와 가장 비슷한 직업?

디자이너가 환쟁이라고 불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예전,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에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을 때, 사람들에게 명함을 건네면 아래위를 훑어보곤 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명함에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되어 있었었는데, 별로 스타일리시하게 입고 다니지도 않았을뿐더러 거의 언제나 회사 로고가 그려진 작업복을 입고 다녔으니, 스타일리스트라는 명함에 적힌 직책과는 참 많이 달라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도 새한자동차는 GM 즉 General Motors 소유였기 때문에, GM이 하던 대로 디자이너가 이니라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렀었습니다. 1929년 미국 최초로 디자이너를 채용함으로써 디자인 시대를 연 회사라고 할 수 있는 GM은 당시에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렀습니다.


하긴, 지금처럼 디자이너라고 적혀 있었었더라도, 디자이너라면 의상 디자이너 밖에 모르던 그 시절에는 자동차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겠지요. 디자이너가 뭐하는 사람들인지를 잘 모르기는 일반인들 뿐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 - 디자인실이 연구소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엔지니어들이 주로 많았는데 - 도 디자이너는 그림 그리는 사람 정도로 이해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와 비슷한 직업이 어떤 게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종종 나눴던 거 같습니다. 학교는 다닐 때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고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The Arts and Man의 표지

1969년에 UNESCO에서 출판한 The Arts and Man이라는 책을 아직 학생 시절인 77년에 거금을 주고 사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서가에서 꺼내보니 그 표지에 제가 붓과 포스터컬러로 제목을 써 놓았더군요. 내가 손으로 그린 건데도 인쇄되어 있는 것으로 잠시 착각했습니다. 하하.


그 책은 건축, 미술, 디자인, 영화, 음악, 문학 등 모든 예술 분야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지게 해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사서는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영어 사전을 옆에 두고 한 자 한 자 찾아봐가며, 밑줄 그어 가며 읽었고, 350개 정도 되는 사진은 지금도 거의 다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제가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시각을 만들어준 책 중의 하나입니다. Chapter 4의 제목은 The contribution of industrial design to twenty-century aesthetics, 즉 20세기의 미학에 미치는 산업 디자인의 역할이고, 커다란 제도판에 분필로 자동차의 실제 크기 도면을 그리고 있는 삽화도 있습니다.


20세기의 미학에 영향을 끼칠 산업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한 제 4장의 서두 부분


그 책의 Chapter 5는 Buckminster Fuller가 쓴 The artist-scientist-inventor입니다. 그 글에서 Fuller는 모든 인간은 원래 예술가-과학자-발명가로 태어나는데, 성장하면서, 또 자신만의 욕구와 능력에 따라 점차 이 셋 중의 하나, 혹은 두 가지의 자질만 남은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디자이너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디자이너라면 창의적인 능력, 분석적인 능력, 그리고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다 있어야겠지요. 즉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발명가를 합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제 5장 The artist-scientist-inventor의 서두 부분

사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특히 저와 같은 산업디자이너들은 디자이너와 유사한 직업으로 건축가와 예술가 그리고 엔지니어를 꼽을 겁니다. 적어도 '기능'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위의 Fuller가 보는 시각과 비슷한 거지요. 때로 디자인은 예술과 기술의 중간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다들 비슷한 관점에서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를 이런 기능적인 면으로만 보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제한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디자이너가 하는 일, 또는 해야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는 직업들을 몇가지 적어 보겠습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Stand-up Comedian


미국 아이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 중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코미디언의 한 종류이지요. 로빈 윌리암스도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이고, 에디 머피, 제이 레노 등 꽤 이름을 날린 스탠드 업 코미디언들이 참 많습니다. 쟈니 카슨도, 또 그를 통해 연예계에 발을 들였던 쟈니 윤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습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우리나라 개그 프로그램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혼자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보고 말로만 코미디를 하는 겁니다. 슬랩스틱 같은 연기도 없이 거의 말로만 사람들을 웃기는 거지요.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자기 주제로 끌어들이고, 동조하게 만들고,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한번 우리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가정해 볼까요?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로 내가 무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수백 명의 관중들과 나 사이에는 달랑 마이크 하나만 서 있을 뿐입니다. 관객석은 조용하고 어디 숨을 곳도 없고요. 조명은 나한테로 다 향해 있습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큐.


상황 1. 몇 마디의 서두를 꺼내고 때가 되었을 즘에 생각했던 대사를 던집니다. 가까이 있는 관객들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곧 떠나갈 듯한 웃음바다가 됩니다. 박수를 치고 또 눈물을 닦는 사람도 보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또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서 몸을 앞으로 당기고 귀를 쫑긋합니다. 대 성공입니다.


상황 2. 몇 마디의 서두를 꺼내고 사람들이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싶을 때 생각했던 대사를 던집니다. 한데, 어쩐 일인지 다들 그저 듣고만 있습니다. 내 등에는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려 갑니다. 어라, 사람들이 웃어야 되는데... 다음 대사는 생각이 안 나고 앞이 막막해집니다. 무대 옆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을 감독의 눈초리가 느껴집니다. 대 실패.


그저 약간 우스운 이야기를 할 줄 안다고 해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웃음의 코드를 알아야 합니다. 사회가 돌아가는 이야기에 능통해야 하고 문학적인 소질도 있어야겠지요. 말의 속도, 피치, 강약, 몸동작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할 겁니다. 어디선가 들었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또 했다가는 감독이 두 번 다시 부를 일 없을 겁니다.


디자인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리서치 잘하고, 잘 그리고, 잘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디자이너가 완성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동이 없는 디자인을 하면? 설명서를 자꾸 꺼내봐야 하는 물건을 만들면? 게다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디자인을 하면? 또 부를 일 없을 겁니다. 쓸만한 디자이너가 아니거든요.


싱어 송라이터 Singer-songwriter


작사, 작곡, 연주, 노래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들을 싱어 송라이터라고 부르고, 대부분의 싱어 송라이터들은 포크송, 즉 민중 음악을 만들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싱어 송라이터에는 Joan Baez, Bob Dylan, 우리나라의 김민기 등이 있습니다. 이 싱어 송라이터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Blowin’ in the wind 같은 반전 가요를 만들고 불렀던 Bob Dylan은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전쟁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2017년에는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지요.


Singer Songwriter Bob Dylan

디자인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움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 즉 사람들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한다면 싱어 송라이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곡은 음악적인 영감을 모아 악상으로 정리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하려면 감수성도 발달해 있어야 하고 음악적인 지식이 충분해야 합니다. 작사는 문학적인 영감을 글로 옮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시대와 문화 코드도 꿰뚫고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있는 단어와 문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단어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게 해야겠지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악보와 가사를 사람들의 귀와 마음에 전달하는 일이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작곡과 작사에 의도된 것을 완벽히, 때로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다르게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디자인 작업은 대개 영국의 Design Council이 정의한, 일반적으로 Double Diamond Process라고 불리는 Discover-Define-Develop-Deliver의 네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이걸 줄여서 Discovering why - Delivering what 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디자인 프로세스와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제대로 한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Discovering why는 왜 이러이러한 것이 아직도 없는지를 발견하는 것이고, Delivering what은 있었어야 할 것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Discovering why는 아직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것, 즉 작사, 작곡과 비슷한 부분이 있고, Delivering what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연주와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과도 참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는 이 두가지 모두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 Preacher


목사 또는 신부 등, 모든 종요에서 내세에 대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디자이너라면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세, 즉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일을 말하는 겁니다. 천국 또는 극락에,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 어느 목사, 신부, 스님도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직접 본 것을 말하는 거라면 지식의 전달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일이니 믿음의 전달이거든요. 흥미로운 것은, 보지 못한 것을 믿도록 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떤 목사는 (성직자는) 다른 분들에 비해 더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겁니다. 어떤 성직자를 통해 믿음을 얻었느냐에 따라서 믿음이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합니다.

 

사진: crosswalk.com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이 이것과 참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나 경영진에 제시하는 디자인은 단순한 새로운 모양의 자동차,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인터페이스가 아닙니다.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통해서 기대되는 미래의 좋은 영향을 보여주는 것, 즉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일이거든요. 클라이언트나 경영진 입장에서는 그 디자인을 채택했을 때 기대되는 투자에 대한 수익이거든요. 즉 디자인의 선택, 또는 결정에는 반드시 기대 이상의 수익이 있을 거라는 확신 - 확실한 믿음 - 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는 단순히 디자인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인을 통한 회사의 수익, 사용자들의 이득 등을 설명해야 하는 겁니다. 이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그 디자인이 채택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하게 됩니다. 문제는 디자이너들도 아무리 깊이 있는 리서치를 해도 그 기대 수익이나 기대 효과를 직접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전달해야 하는 목사나 다른 성직자들과 같이 보지 못한 디자인의 효과를 전달해야 입장에 서 있다는 거지요. 신도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하는 목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듯이, 경영진이나 클라이언트로부터 믿음을 얻어내지 못하는 디자이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대목에서 Christopher Jones가 말한 대로 “Designing is performing a very complicated act of faith”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이전에 쓴 몇몇 글에서 Jones 의 디자인에 대한 시각을 언급했었습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10

https://brunch.co.kr/@sooshinchoi/11

여러분들은 어떤 직업이 디자이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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