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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22. 2024

워싱턴 거리에서

2024년 8월 11일 일요일

나와 딸은 아침 9시에 일어났다. 워싱턴에 와서야 여유로운 아침을 보냈다. 9시 50분에 작은 호텔에서 나왔다. 좁은 방을 작은 침대 하나, 화장실이 차지한 호텔이다. 보일러 위에 널어놓았던 속옷과 양말이 잘 말랐다. 맑은 날씨 덕분이었다. 어젯밤에 외출했다 돌아오니 방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딸과 나는 깜짝 놀랐다. 청소해 준 분이 고마웠다. (가방에 들었던 만 원짜리 지폐 130여만 원이 누구의 손에 의해 사라졌을까? 청소해 주신 분이었을까? 어쩌랴 사라진 걸. 서울에 돌아와서야 알게 된 허망한 일)

애플 매장에 갔다. 내 핸드폰 카메라 렌즈가 고장 났다. 딸은 내 핸드폰을 미국에서 새로 사면 어떠냐고 한다. 나는 돈이 부족해서 망설였다. 핸드폰 구경하러 매장에 갔다. 애플 매장 건물이 특이했다. 오래전 관공서였던 건물을 애플 매장이 사용한다고 한다. 마치 박물관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핸드폰은 구경만 했다. 딸은 매장 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아침 식사하러 카페에 갔다. 딸은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붐볐다. 빵이 맛있어서 유명한 카페라고 한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창가에 앉았다. 워싱턴 거리는 평화롭다. 사람들 걷는 모습도 한가로워 보인다. 지쳐 보이는 사람이 없다.

Passion Church로 오전 11시 30분  예배를 드리러 갔다. 딸이 미리 찾아 놓은 교회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오후 2시다. 우리는 걸어서 성경박물관에 갔다. 박물관 관람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관람료가 4만 원 정도나 되었다. 무료인 줄 알고 갔는데 예상과 달리 관람료가 비싸다고 생각되었다. 아쉽지만 그냥 나왔다. 항공박물관으로 갔다. 일요일인지라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이 많았다. 관람을 하려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몇백 명 정도가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미리 예매를 했어야 한다고 했다. 딸이 또 실수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기쁜 마음이 가득했다. 딸은 우주항공박물관 앞에서 사진 찍어 주었다. Washington Monument를  뒷배경으로도 찍어 주었다. 걸었다. 걷다가 예쁜 정원처럼 가꾸어진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쉬었다. 딸이 신었던 운동화를 벗었다. 운동화에서 쉰 냄새가 난다며 딸은 웃는다. 딸이 신은 운동화는 나이키 아동용이다. 아동용을 싸게 세일해서 샀단다. 아동용이어서 그런지 땀 냄새가 더 심하단다. 성인의 발에서 나는 땀을 아동용 운동화가 감당하지 못하나 보다고 말한다. 나는 다 낡은 딸의 운동화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딸에게 운동화 사러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딸 운동화를 사러 가기로 했다. 커다란 카페로 갔다.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1시간 정도 휴식했다. 비빔밥 같은 샐러드 요리가 맛있었다. 딸은 내 건강을 챙기며 야채와 연어가 들어간 비빔 샐러들 요리를 주문했다. 딸은 노트북을 폈다. 근무하게 될 오마하 병원 주변 방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던 딸은 그곳이 너무 시골이라며 다시 시무룩해진다. 힘든 마음이 보인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딸 운동화를 사기 위해 매장에 갔다. 딸은 마음에 드는 운동화가 없다며 구경만 했다.

다시 매장에서 나와 워싱턴 거리를 걸었다. 걷기에 좋은 도시다. 평화롭고 안전해 보이는 도시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걸어간다. 다른 도시에서는 거의 같은 인종끼리만 다니는 모습이었다. 워싱턴은 달랐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레스토랑, 특별한 요리를 먹으러 갔다. 파스타가 겹겹이 층을 이룬 모양이다. 파스타는 국수처럼 면으로만 된 건 줄 알았다. 샐러드도 정말 맛있었다. 워싱턴 거리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이 걸었다. 우리는 호텔에 들어와 편히 쉬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딸은 내 품에 안긴다. 엄마 없이 어떻게 지내냐며 운다. 딸은 어려서부터 강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내가 지쳐 있어서 나에게 응석을 안 부린 거다.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의젓했어야만 했던 가정, 그 가정에서 성장하느라 강해져야만 했던 딸이다. 나는 딸이 대학 3학년 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그때서야 알았다. 딸이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 우울한 때를 이겨내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아픔을 안고 살았던 딸이다. 그래서 미국에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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