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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23. 2024

오마하에 도착했다.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아침 7시 30분에 잠에서 깼다. 창밖에 햇살이 환하게 비쳤다. 워싱턴 D.C Hilton호텔. 9시에 호텔에서 나왔다. 기차역까지 걸어서 20분 걸렸다. 워싱턴 거리는 월요일 아침에도 한산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공사하는 곳도 없다. 기차역에서 소시지빵과 커피를 샀다. 딸은 아침에 많이 먹고 싶지 않은지 빵을 한 개만 샀다. 커피도 한잔만 샀다. 우리는 기차역 내에 있는 카페 의자에 앉았다. 워싱턴에서의 마지막 음식이다. 다정하게 나누어 먹었다. 소시지 빵보다 야채방이 더 좋은데, 야채빵이 없었다. 기차역 안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딸이 빵을 먹으며 말했다. "엄마, 오빠는 아빠로부터 돈을 한 푼도 안 받았는데, 나만 받아서 오빠에게 미안해." 딸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등록금이 엄청 큰 액수였다. 그동안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내가 감당해 왔다. 딸 석사과정 등록금은 너무 큰 액수였다. 처음 입학 등록금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어 해결되었다. 그 힘을 입어 미국 유학길에 발을 내디뎠다. 딸은 장학금을 타면서 공부를 마치려고 애썼다. 연구실에서 일하며 생활비도 스스로 해결했다. 하지만 그 학교의 등록금은 태산처럼 다가왔다. 딸과 내가 감당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남편은 딸의 부탁을 들어주어 등록금을 내주었다. 딸은 그 거액의 돈을 자기만 받아 써서 오빠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그런 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지금은 딸에게 돈이 갑자기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딸이 오빠와 대화할 때 그런 마음을 살짝 전해주면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아니 아들은 진작에 딸의 이런 상황을 더 응원했다. 아들은 동생이 끝까지 잘 해내기를 바라며 힘을 보태준다. 서로를 엄마인 나보다 더 잘 알고 챙긴다. 남편과 내가 갈등 속에서 평안한 부모 역할을 못해올 때, 두 남매는 서로 의지하며 다독여 왔다. “엄마, 오빠랑 내가 이렇게 서로에게 관심 갖고 챙기게 된 건,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우리라도 잘 살아내려고 그랬나 봐.” 어느 날 딸이 나에게 말했다. 부모가 주지 못하니 스스로 잘 살 길을 찾았던 두 자녀다.

시어머님 돌아가신 후 남겨진 돈이 있었다. 그 돈 중에 아들에게 할당된 것도 있었다. 아들은 그것도 동생이 공부하는 데 사용하라며,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에게 주었다. 엄마인 나는 아들 마음이 고맙고도 갸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자신의 생활도 넉넉지 않아서 필요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데 다 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늘 그렇다. 딸은 그렇게 마음 써 주는 오빠에게 두 가지 마음이다. 고마움과 미안함이다. 나는 이런 아들과 딸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살아갈 힘이 더 생기는 뿌리다.

어젯밤에 잠자리에서 딸과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딸이 펑펑 울자 나도 울었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끌어안은 딸, 몸부림치며 우는 딸,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준비했다. 딸이 평안하게 안겨 울 수 있는 엄마 품, 그런 포근한 품이 되기 위해 기도했다. 딸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주는 담대한 엄마, 강하고 따스한 엄마로 딸 곁에 있어 주려고 미국에 왔다. 딸은 자신이 이렇게 돈 쓰면서 계속 이대로 나아가야 하는지 의심스러워했다. 남편은 딸 등록금을 은행 대출을 받아 내주었다. 딸 마음을 힘들게 하는 한 가지다.

워싱턴에서 10시 30분 기차를 탔다. 어느새 오마하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오마하에서 묵을 방을 예약해 놓은 딸이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니 점심 때다. 오늘 오마하로 가야 한다. 딸이 한 달 동안 지냈던 친구 방에서 짐을 다 가지고 나왔다. 함께 지냈던 학생 두 명이 1층까지 짐을 옮겨 주었다. 큰 캐리어 세 개다. 기내용 캐리어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개다. 택시를 불렀다. 대형 택시다.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시카고 공항을 경유하여 오마하 공항에 도착했다. 딸은 합격 소식을 받고 나서 고민을 했었다. 오마하에 갈 것인지 다른 곳을 더 알아볼 것인지. 오마하 연구실에서 합격 소식이 오기 전까지, 나와 딸은 고민했다. 만약 아무 곳도 합격이 안되면 짐을 어떻게 하고 딸은 어디에 묵어야 할지. 딸은 남부 쪽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더 지원해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나와 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텍사스에 지인 가정이 살고 있어서 여행 마지막 장소로 그곳에 가기로 했는데, 혹시 그 가정에 한 달 정도 딸이 있어도 될지. 딸과 나는 그 가정에 폐가 될지도 모르기에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나는 지인 부부를 선교단체에서 만났다. 그 단체 안에서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제자 훈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1년 동안 같이 했다. 더군다나 내가 제자훈련을 받을 때, 지인부부는 간사로 섬기는 역할을 해주었다. 친절하고도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때 이후,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지금은 텍사스에서  음식 사업을 한다. 나와 딸의 여행 마지막 장소가 텍사스다. 미국에 오기 전, 지인분과 통화를 했다. 미국에 가는데 간사님 부부를 만나고 싶다고. 지인분은 정말 반가워하며 집에서 며칠 지내란다. 서울로 떠나기 전, 2박 3일 동안 지내기로 했다. 지인분은 부부가 서로 상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답이 없었다. 그 사이에 오마하 연구실에서 연락이 왔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텍사스 지인분들에게서 연락이 안 오고 있던 차에, 가야 할 곳이 확실해졌다. 텍사스로 가기 전까지 며칠 동안에 오마하에 방을 구하면 되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이 넘쳤다. 딸은 긴장된 마음인 듯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감사한 마음을 안고 오마하로 갔다. 텍사스 지인분들께 합격 소식을 전하고. 합격소식을 들은 지인분은 딸이 한 달 동안 있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분들의 따스한 말이 우리 모녀에게 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시카고를 경유하여 오마하에 도착하니 밤이다. 오마하 공항에서 택시 타는 곳까지 짐을 옮기는 일도 벅찼다. 딸이 큰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내가 큰 캐리어 한 개와 기내용 캐리어 두 개를 캐리어를 끌었다. 낑낑대며 끌고 있는데 키가 큰 백인 남자가 다가와 도와주겠다고 했다. 택시 타는 곳까지 가뿐하게 끌어다 주었다. 낯선 오마하 도시의 첫인상이다. 따스한 마음이 도시의 마음일 거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아파트다. 방은 하나인데 부엌과 거실이 넓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숙소까지 짐을 옮기는 일도 어려웠다. 오마하, 내일부터 방을 알아보러 다녀야 하기에 샤워하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나와 딸이 어떻게 오마하까지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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