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3킬로미터쯤 가면 바다가 있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사라졌다. 같은 마을에 살던, 같은 학년 남자아이와 그 아이 동생 두 명, 내 동생 두 명, 바다에 갔던 기억이 난다. 방학 때여서 자주 갔는지는 모르겠다. 갯벌도 있는 바다였다. 물속에 들어가는 않고, 썰물 때, 바닷물 밖에서 갯고동을 줍거나. 게를 잡았다. 그때는, 내 안의 꼬마 아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았다. 친구들하고도 잘 아울렸다.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하고, 솔방울을 주우러 가기도 하였다. 그때는 시골에 가스가 없었다. 산에서 주워 온 나무를 아궁이에 넣어 불을 지폈다. 솔방울도 땔감 중에 한 가지였다. 달래 캐기, 냉이 캐기, 토끼풀 뜯으러 다니기, 소 풀 먹이러 소 끌고 들판에 가기, 학교 운동장에서 공기놀이, 철봉 놀이 하며 놀기, 땅에 십자가 모양 그려 놓고 십자가 놀이하기, 한 겨울 눈이 쌓이면, 산 언덕에 올라가, 비닐포대에 볏짚을 넣어 만든 눈 설매 타기. 벼를 베고 난 빈 논에, 아버지가 물을 가득 채워 만든 얼음판에서 스케이트 타기,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연, 윷가락,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상처가 무언지도 모르고 지나도록 해 준 일들이겠지!
어린 시절 철없이 놀던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한 건, 중학생 때부터인 듯하다. 큰 오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분위기는 절망과 우울함으로 가득하였다. 서프보드 위에서 떨어져 바다에 고꾸라졌을 때, 그 바닷속 느낌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없어졌다. 고등학생 때,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보기 시작했던 거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때다.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다. 쏟아놓을 대상이 필요했다. 답답했다. 나는 내 마음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 바다에 놀러 간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여름휴가로 몇 번이 전부다. 서해안 갯벌 체험, 동해안 해수욕장, 제주도 여행이다. 제주도는 바다보다 유명 관광지에서, 남편에게 사진 찍히느라 긴장되었던 순간만 기억난다. 폐암 수술 후, 나는 바다를 매일 본다. 강릉, 포항, 제주도. 2018년부터 서울집을 나와 옮겨 다니는 곳이다. 강릉, 수술 후, 회복되지 않은 불편한 몸을 추스르며 지낸 곳이다. 아들이 함께 해주었다. 아들은 강릉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포항은 강릉을 거친 후 건강 회복을 위해 자연과 함께 했던 두 번째 지역이다. 딸이 포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싫어했던 딸이었다. 마침 나와 같이 지낼 기회가 되어, 강릉에서 9개월 정도를 보내고, 딸이 있는 포항에서 함께 지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2년 6개월 정도다. 제주도는 2023년 1월 9일부터 살기 시작하였다. 함덕해수욕장 근처에서 6개월, 외도에서 6개월, 이호테우 해수욕장 근처에서 1년째 살고 있다.
강릉 바다는 깊다. 송정해변, 안목해변이 가장 자주 간 곳이다. 파도가 거센 날에는 파도가 나를 깊은 바다로 끌어들일 것 같아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그런 날에는 경찰이 순찰을 돌기도 한다. 모험 삼아 큰 파도와 장난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소나무 숲에서 나는 솔향을 맡으며 바다를 걸었다. 강릉 집에서 송정해변까지는 걸어서 50분 정도다. 나의 하루 목표는 걸어서 바다를 보고 오는 것이었다. 새벽 바다는 더 상큼하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회와 가까운 강문해변에 구경하러 가곤 하였다. 새벽 조깅으로, 안목 해변까지 달려온 아들과 만나, 해변 벤치에서 아침 묵상을 하기도 하였다. 아침 바다 수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보았다. 강릉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이 든다. 작은 두려움과 긴장이 한꺼번에 싹 쓸려가는 듯하다. 경포해변에서 쓰레기 줍기 봉사도 여러 번 하였다. 강릉 바다와 2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강릉 해변에서, 아들과 딸, 강아지와 걷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언니와 여동생이 찾아왔을 때, 지인분들이 놀러 왔을 때, 친구가 다니러 왔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 바다로 갔다. 바다를 바라보며, 소나무 숲 속에서 달리기와 산책도 거의 매일 하였다. 강릉 송정해변에는 소나무밭이 있다. 강릉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소나무가 있는 강릉 바다에 갔다. 하루에 하는 일이라고는 산책과 음식 챙겨 먹기가 전부였다. 지루한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내려는 안간힘, 강릉에 있는 해변을 두루 돌아다녔다. 경포해변, 사근진 해변, 안목해변, 강문해변, 정동진, 사천진, 주문진, 안인, 순긋해변, 송정해변. 걸어서 가기도 하고,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 내 승용차로 가기도 하였다. 혼자라서 외롭다고 느껴질 때, 바다는 내 친구가 되어 주었다.
포항 바다다. 영일대 해수욕장, 칠포해수욕장, 오도리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 월포해수욕장, 구룡포해수욕장, 화진해수욕장, 이 중에서 집과 가장 가까운 영일대 해수욕장에 수시로 놀러 갔다. 집에서 걷기 시작하면 영일대 해수욕장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다른 곳은 내 차로 다녔다. 칠포해수욕장은 딸과 함께 록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았던 곳이다. 영일대 해수욕장에 가는 중간에 산을 거쳐서 걸어가곤 했다. 산 위에 올라서 바다를 내려다볼 때, 넓게 펼쳐진 파란 바다는 마음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제주도에 살면서 가장 먼저 친해진 바다는 함덕해수욕장이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 살던 곳이 함덕리였기 때문이다. 함덕해수욕장은 바다색이 에메랄드빛이다. 맑고 맑은 푸른빛을 띤다. 서우봉 언덕에서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다보면 해외여행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바다색을 보곤 했다. 나는 하와이도 괌도 가보지 못했다. 함덕해수욕장은 괌, 하와이보다도 더 뛰어난 해변일 거라 생각하곤 한다. 아침 출근 할 때에도, 퇴근할 때도 바닷가로 다녔다. 가끔은 퇴근할 때, 서우봉을 산책하며 내려오다가 바다를 즐기곤 했다. 외로움과 절망에 갇혀 자신감을 잃어가는 나에게, 용기를 줄 방법은 바다를 보며 산책하는 것이었다.
이호테우해수욕장은 내가 맨발 걷기를 시작한 곳이다. 모래를 맨발로 밟을 때, 발가락 사이로 들어가는 작은 알갱이들, 밟히는 대로 저항 없이 모양을 만든다. 살랑살랑 발을 적시고 다시 돌아가는 바닷물, 나는 모래와 밀려왔다 나가는 바닷물과 이야기한다.
“안녕,”이라고 말하면, 모래도 바닷물도 “안녕”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사춘기, 중학생 때부터 시골에서 부모님과만 지냈다. 다른 형제들은 서울로, 다른 도시에서 지냈다.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유독 크게 받아서 혼자 부모님 곁에 남은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동생들은 서울 유학 생활을 하기 위해 전학을 갔고, 할머니와 고모는 두 동생을 돌보며 서울에서 지냈다. 오빠도 나중에 서울로 갔고, 언니는 다른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시골에 혼자 남은 나는, 절망과 우울한 마음이 가득하셨던 부모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드릴까 방법을 찾아 애썼다. 청소, 빨래, 식사 준비, 밭에 나가 일하기,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은 나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내가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상은, 흰둥이 강아지, 주변 나무, 하늘, 별, 구름, 새, 자연이었다.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겐 자연스러웠다. 대학생 때, 내가 나무와 이야기한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말하였다. 이호테우해수욕장에서는 쓰레기도 혼자 줍기도 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내오다가, 결혼하고 직장에서 동료 교사와 말할 때, 나는 바람과 이야기한다고 말했더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다고. 그때부터 나는, 내가 자연과 말한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과 말하는 것을 못했다면, 나는 내 마음을 터 놓을 대상이 없어서, 옴짝 달짝 못하고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