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 아이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들에게 책잡힌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내 잘못을 감추기 위해 변명을 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그 많은 아이들을 상대할 때 얼마나 많은 실수가 있었을까! 20년 전이나, 30년 전에는 전혀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떠올려진다. 구체적으로 생생한 장면이 그려지지는 않지만, ‘미안해’라고 말해야 할 순간들이 종종 일어났을 상황들이다. 초임 때는 한 학급 학생 수가 요즘보다 2배 3배였다. 교사가 등교 시간부터 하교 시간까지 어쩌면 한 마디의 대화도 못 나눈 아이도 있었을 거다. 그것도 미안한 일이다.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대답을 해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서로 갈등을 겪었을 때, 급하게 화해하도록 이끌었을 거다. 숙제를 해오지 못했을 때, 숙제를 왜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성실하지 못하다며 꾸중을 했을 거다. 그 당시에는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잘못을 했을 경우, 회초리로 맞기도 했으니까. 교사는 학생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상황을 마무리했을지도.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한 가지는, 학급 아이가 나에게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 학생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던 거다. 나는 그 아이가 변명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만 추궁하다시피 했다는 거다. 그때 내가 학생에게 한 반응으로 그 학생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다면 꼭 사과하고 싶다. 어디 그런 일들이 한 가지뿐이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생들 앞에서 권위적이기보다는 좀 더 친근하게 존중하는 말투로 다가갔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6학년 담임을 자주 맡았다. 6학년이 되면 사춘기의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학급 아이들끼리의 갈등이 커져서 1년 동안 그 갈등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했다. 나는 그 갈등을 해결하려고 아이들 사이에서 발버둥 쳤다. 2000년대 초에 서울 어느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여학생들끼리 무리 지어 벌어진 갈등이었다. 두 무리로 나뉜 상황이었다. 내 손에서 유리컵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저, 학급 담임교사가 모든 걸 짊어져야만 했다. 그런 일들이 생기면 두려웠다. 아이들의 대화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끼리 대화할게요. 선생님이 관여하시니까 불편해요.”
뒷담을 들어서 속상하다는 아이가 나에게 한 말이다.
뒷담을 한 아이는 그 말이 뒷담이 아니라고 해명하려 하고, 뒷담의 대상이 되는 아이는 그 말이 뒷담일 수밖에 없어서 기분이 나쁘다는 거였다. 그 두 아이를 중심으로 학급 여자아이들이 두 무리로 나뉘었던 거다. 아차 하는 순간 고학년 여학생 사이에서 쉽게 생기는 분위기였다.
나는 서로의 입장에서 충분히 들으려 하지 않고, ‘배려하자, 용서하자.’라는 말을 너무 성급하게 말했던 거였다. 내가 본 것만으로 판단하여 서둘렀던 거였다.
“주희야, 친구 마음 아프게 하면 어떻게 해.”
“선생님, 자세히 모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내 말을 들은 그 아이는 억울하다는 말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학급 남자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후, 여자 아이들만 남긴 자리에서 나는 주희에게 내가 한 실수를 사과했다.
“주희야, 미안해. 내가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말해서.”
그런 나를 다른 아이들이 쳐다보았다. 아이들 분위기가 나를 위로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나와 약속한 대로 스스로 풀어갔다. 1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여자 아이들은 나를 더 신뢰하는 듯했다.
내가 ‘미안해’라고 한 말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 일을 겪은 뒤로 나는 “미안해”라는 말이 지닌 긍정의 힘을 알았다.
“그래, 내가 네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랐어.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오해해서 미안해.”
사과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미안해, 얘들아. 선생님이 잘못 알았네.”
“미안해. 너희 시간을 빼앗았구나.”
“미안해”라는 말은 나를 무너뜨리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상황을 이겨낼 힘이 되는 말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을 할 때마다 내가 했던 실수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더 친근하게 대했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내가 “미안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선물이었다.
초임 때,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바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성향이 컸다. 교사라는 위치에서 ‘실수하는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라는 편견이 나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