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연휴였던 주말에 서울에 있는 딸과 통화를 했다. “엄마, 혹시 나 미국에 갈 때 엄마도 가고 싶어?” “그럼, 엄마도 가고 싶어.” “엄마, 나 비행기표 예매할 거야. 그럼, 엄마 여권 확인해 봐.” 여권을 확인해 보니 2022년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연휴가 끝나고 첫 출근을 한 오늘 조퇴를 하고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며 유학 준비와 장학금 준비를 해오던 딸이다. 마침내 한 학기 장학금을 담보로 미국으로 유학하러 간다. 그 이후의 일들은 공부하면서 주어지는 것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고 가는 딸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런 딸과 며칠이라도 낯선 땅에서 함께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미국에 다녀오려면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
딸이 오늘 저녁 6시 40분에 제주도 공항에 도착한다. 배웅하러 가는 사이 시간에 여권을 만들기로 하고 아침에 출근할 때 옷에 신경을 썼다. 깔끔하고 사진이 잘 나올만한 갈색 블라우스로 입었다. 나를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옷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권에 들어갈 사진이 잘 나오길 기대하며 아침부터 표정도 밝은 모습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후 2시까지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쉴 시간 없이 보내고 나니 표정이 아침과 다르게 피곤함으로 구겨진 느낌이다.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긴장되었다.
제주도청으로 가다가 어젯밤에 미리 검색해 놓았던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사진관의 분위기와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검색 리뷰에서도 좋은 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사장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자니 나도 모르게 긴장하는 표정으로 변한다. 카메라를 보는 순간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이 잘 나오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정작업이 다 될 때까지 차분히 앉아서 기다렸다. 10여 분이 지난 뒤, 다 되었다고 부르셨다. 사진은 맑고 깨끗하게 나왔지만, 내가 아닌 듯한 표정이다. “일반 증명사진으로도 만들어 드릴까요? 모두 8장인데 여권 사진 4장, 증명사진 4장으로 해드릴까요?” 나는 사진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러한 티를 내지 않고 그렇게 해달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친절하고 정성으로 일을 하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진관에서 나와 다시 제주도청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기에 지나가면서 보이는 사진관이 있으면 그곳에서 다시 촬영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운전했다. 하지만 여권을 만드는데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글을 보았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제주도청으로 향했다.
제주도청에 도착할 때쯤, 좀 전에 찍은 사진이 떠올려지며 다시 찍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제주도청 주변에 있는 사진관을 검색했다. 바로 도청 앞에 여권, 증명사진 전문 사진관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권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사장님과 촬영 기사님이 편안한 분위기로 맞아 주셨다. 다른 사람들도 들락날락하니 그저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마음이 됐다. 처음 사진관과는 달리 이곳은 서서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있어야 하는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자연스럽게 평소의 당당하고 여유있는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사진을 출력하기 전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셨다. 처음 사진관에서와는 달리 나 자신을 그대로 잘 담아내는 사진들을 보며 만족스러웠다.
뿌듯하고 기쁜 마음으로 도청에 들어갔다. 2만 원을 더 낭비하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그 2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보일러 가스 비용 아끼려고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외출로 설정해 놓고 지냈으면서 말이다. 잠깐 사이에 한 얼굴에서 두 표정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잘 나타내주는 나를 선택했다. 값을 지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