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나의 폐암 수술 후 우리 가족은 흩어졌다. 아들은 강릉에서 고등학교 기간제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딸은 포항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남편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8월 30일은 나의 폐암 수술 5년째다. 지금 우리가족은 다 흩어져서 생활한다. 아들은 강릉에서 딸은 미국에서 남편은 서울에서 나는 제주도에서.
처음 몇개월에서 1년 정도는 내가 남편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남편이 그러면 혼자 밥해 먹고 지내?"
"가족이 다 떨어져 있네!"
나를 아는 대부분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의 억양이나 말투에서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우리 가족을 걱정해 주는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이 스스로 남편을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에게 5년은 진통의 시간이었다. 남편은 혼자 지내는 삶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나를 자신이 있는 서울로 오게 하려고 했다. 폐암 수술 후,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강릉에서 교직 생활을 하는 아들과 지냈다. 20대 후반이었던 아들은 좁은 원룸에 살고 있었다. 나에게 작은 방과 침대를 내어 주고 자신은 다용도로 쓰이는 좁은 거실에서 잠도 자고 불편한 생활을 했다. 그래도 아들은 나에게 항상 밝은 표정을 지어주고 긍정의 말을 해주었다.
"엄마, 괜찮아."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아들은 내가 폐암 수술 후 몸과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갈 때 기쁨과 웃음을 안겨 주었다.
나는 아들과의 1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포항에서 딸과 2년을 함께 생활했다.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딸과의 생활은 아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엄마, 오빠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달라."
"오빠는 다른 사람을 너무 신뢰한단 말이야."
딸이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은 수술 후 몸과 마음을 다시 건강하게 일으킬 힘을 주었다면 딸은 새 일을 어떻게 찾아갈지 도전의 눈을 뜨게 도와주었다.
딸과 지내면서 '한국어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릉에서, 제주도에서 기간제 교사로 활동할 힘도 불어넣어 주었다. 내가 이루고 싶어 했던 글쓰기를 하는 것도 딸의 응원 덕분이다. 딸은 내가 도전하도록 실제적인 자료들을 찾아준다. 그런 딸이 힘든 과정을 거쳐 8월 2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가 지원해 줄 돈이 없다 보니 딸 스스로 1년여 동안 안간힘쓰며 준비한 결과다.
우리 가족은 딸이 있는 미국에 다녀오기로 계획했다. 아들은 올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동생과 함께 구정 명절을 보내고 오겠다고 한다. 남편과 나는 2024년 여름 8월에 가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5년 동안 서로 떨어져 지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 가족은 앞으로도 계속 각각 다른 곳에서 생활한다. 남편도, 아들도, 딸도, 나도 성숙한 개인으로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 가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다 좋은 가족이라고 할 수 없어요. 어떤 경우에는 떨어져 지내면서 각자 좋은 힘을 키워가는 가족이 더 건강한 가족이 되기도 해요." 2019년 7월 포항에서 내가 상담받을 때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해 준 말이다.
우리 가족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가고 있다. 서로 거리 두기를 하며 말과 행동을 더 신중하게 한다. 평행선을 달리는 가족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족은 나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힘을 주고 있다. 나의 삶을 보며 남편, 아들, 딸이 더 도전받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