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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15. 2023

엄마의 일기

     엄마가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했더라. 너희 태어났을 때도 육아일기를 썼고, 2002년 가족 유럽 여행을 갔을 때도 글을 썼더라고.

    공책에 썼던 일기들을 요즘 컴퓨터로 다시 옮겨 쓰고 있단다. 엄마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들이 정말 많아서 이사 다닐 때마다 짐 덩이가 되기도 하지. 그런 걸 왜 싸놓고 안고 있냐고 하면서 딸이 몇 권은 버렸지. 그때 버려진 일기장 중에 육아일기도 있고 엄마가 아빠를 사귈 때 쓴 일기도 있는데 말이야. 딸이 버릴 때 엄마랑 잠깐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 일기장들은 끝내 찢겨서 버렸지. 다행히 다른 것들은 엄마가 안간힘쓰며 막았지!


    어제는 탐라도서관에서 노트북으로 2002년에 유럽으로 가족여행 갔던 이야기들을 옮겼단다. 일본을 경유하여 영국, 이탈리아 이야기까지 썼단다. 너희가 어렸을 때였는데 엄마는 어떻게 일기를 썼을까? 글을 보니까 밤에 쓰지 않고 여행 다니면서 여행 중간중간 계속 쓴 것 같았어. 일기 사이사이에 딸이 낙서한 것도 있어. 끝말잇기 말이야. 2002년도에는 딸이 여섯 살이야.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가 몹시 힘들었던 때도 일기를 매일 매일 썼더구나. 엄마 아빠의 힘든 관계로 너희들이 겪은 마음의 상처가 엄마에게 큰 아픔이었더구나. 미안함이 일기 곳곳에 쓰여 있었어. 그런데도 너희가 이렇게 잘 성장해서 정말 고맙단다. 엄마 아빠가 단란한 모습을 너희에게 누리게 해주지 못해서 그런지, 엄마가 요즘 산책할 때, 어린 자녀와 젊은 부부가 함께 다정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마음이 정말 행복하단다. 


    2018년 폐암을 선고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는 거의 매일 쓰고 있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말들이 일기 곳곳에 들어 있단다.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에 쓴 엄마의 일기를 읽으며, 그 당시 엄마를 스스로 칭찬하기도 해. 힘든 순간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 상황에 있던 엄마가 짠한 생각이 들며, 잘 이겨내고 와서 기특하다고  혼자 미소짓는단다. 엄마 재미있지.


    엄마에게 일기는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던 거야. 고통스러움, 답답함, 감격스러움, 속상함. 엄마의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비밀의 장소였어.

 엄마가 엄마의 일기에서 발견한 것이 있어. 엄마 앞에 닥쳐온 상황을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동안에는 일기를 열심히 썼는데, 술을 마시기도 하며 도피하는 듯한 생활을 했을 때의 일기는 없었어. 그래서 깨달았어.

아,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이 엄마의 삶을 더 잘 가꾸어 가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엄마는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엄마의 삶 이야기를 쓰려고 해.

 사랑스러운 자녀들아, 너희도 너희 이야기를 가끔 쓴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단다. 너희가 쓴 진솔한 이야기를 엄마가 몰래 읽은 적이 있어. 허락 없이 읽어서 미안해요.

    공책에 썼던 일기들을 컴퓨터로 다 옮겨쓰려면 몇 개월이 걸릴 듯싶어. 그냥 버릴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 하지만, 그 일기가 어디에 쓰이지 않을지라도 엄마는 그냥 그 일을 해내고 싶단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권의 책으로 남기게 되면 정말 행복하겠지! 엄마가 너희에게 물려 줄 유산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 일기가 소중한 유산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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