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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 May 24. 2022

할머니와 여름

라일락 글쓰기 모임 첫 번째 주제 '여름'

어렸을 때 '할머니'라고 부르면 어른들이 내 말을 고쳤다. 

'친할머니', '외할머니'라고 해야지 이렇게 말이다. 

왜 친할머니를 친할머니라고 불러야 하고 외할머니를 외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몰랐다. 


아빠의 엄마든, 엄마의 엄마든

할머니 집에 가면 나프탈렌 냄새가 나고, 계피맛 사탕이나 박하맛 사탕이 있는 건 똑같기 때문이었다.


왕할머니가 계피맛 사탕이나 박하맛 사탕을 '묵으라'하면서 주시면 나는 덥석 받아서 입에 홀랑 넣었다.

할머니가 주는 건 내가 좋아서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머니가 내 삶에 스며들었다.


할머니들이랑 함께 보낸 여름은 참 재밌었다. 


외할머니댁 마당에서 다라이에 수영한 기억도, 버찌 나무에서 버찌도 따먹고, 모기향 피우고 모기 장안에서 자는 것도 좋았다.

무화과를 많이 먹으면 혓바늘이 돈다는 것도 그렇게 배웠다.


친할머니랑 사촌언니랑 나랑 셋이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 여름이 생각났다. 

여름방학 맞이 여행이었다. 

기차는 빨리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에 가면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덜컹덜컹 바퀴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호두과자 있습니다. 삶은 계란. 버터 오징어. 사이다 있습니다.'

긴 여행 시간 동안 나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기차 판매원이 파는 칸쵸나 음료수를 사 먹으면서 여행 가는 기분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번이 나의 계획은 무산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콩시루 떡에 삶은 옥수수를 바리바리 챙겨서 기차를 탔다. 

경기도에 사는 딸 내 집에 간다고 시골 떡방앗간에서 특별 주문 제작한 콩시루 떡 때문이다. 


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구시렁 걱정을 늘어놓았다. 


 “시루떡 상하는 거 아닌가..” 

“시루떡 괜찮으려나..” 

“시루떡 괜찮은지 좀 묵어볼까?” 

"아야. 수연이 니도 무라"

"목 안 막히게 조심히 무라"

"네"


나는 할머니가 건네주는 떡을 먹었다.


할머니는 떡과 옥수수를 엄청 좋아하셨다. 

옥수수만 보이면 먹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옥수수를 좋아하셨다. 


어느 여름날, 아빠가 나를 불렀다.

‘옥수수 킬러. 최수여이 나와봐라. 옥수수 무라’ 

‘옥수수 삶았나?’ 


조용히 옥수수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아빠가 말했다. 


‘수연이 니 할머니랑 똑같네’ 

‘뭐가?’ 

‘할머니도 옥수수 좋아하는데’ 

‘맞나?’ 


어느 날 할머니께서 마산에 오셔서 할머니를 배웅하게 되었다.


"할머니 제가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여기 계단 있으니까 조심히 오세요"

할머니는 멈칫 멈칫 계단을 올라오시다가 마셨다. 

그리고는 쭈뼛쭈뼛 어딘가를 계속 쳐다보셨다.


뭘 보시나하고 봤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 쪽을 향해 보고 계셨다.


"옥수수 얼마고?"

"옥수수 5개에 3천 원..? 뭐 이리 비싸노"

"할머니 옥수수 드시고 싶으세요?"

"억씨로 비싸네"

 "할머니 옥수수 드실래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3천 원을 꺼내 옥수수를 샀다. 

옥수수 봉지를 할머니 손에 쥐어 드렸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나도 어른이 됐구나..' 

얼마 없던 돈이었지만 평생 받았던 사람에게 좋아하는 걸 선물할 수 있는 순간이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구나라고 느꼈다. 


옥수수 말고도 할머니랑 닮은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할머니의 입맛도 닮았지만 잠만보 기질을 닮았다. 


할머니는 내가 잠이 많은 걸 보고 ‘잠만보야~ ’ 하면서 나를 놀렸다. 

그리고는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잠이 많을꼬’ 

‘할머니도 잠이 많은데’하며 멋쩍게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잠이 많을꼬’ 하면서 아주 크게 웃으셨다. 


나는 할머니도 잠 많으면서 왜 나를 놀리는 건지 그 재미를 이해 못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화환을 보냈다. 

‘할머니 사랑해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화환을 사는 게 참 쉽게 잘 되어 있었다.

화환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추모를 하려면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죽음은 천천히 예고를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됐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봤지만

지금 짐을 싸서 비행기에 탄다는 가정하에 발인 시간에 겨우 맞춰서 갈 수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지금 가야 할까? 


나는 안 가는 걸 택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게 한 편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가족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게 나를 편하게 했다. 

사이가 안 좋은 가족들 사이에서 감정의 무게를 지는 것도 지겹고, 평소에 어머니에게 잘 못해서 마음 아파하는 아빠를 보는 것도 싫었다. 

이런 게  지겨워서 한국을 떠났다. 속이 시원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장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그래서 이런 추억을 돌이켜보나 보다. 정말 떠났다는 걸 알기 위해서.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나에게 한없이 사랑을 줬던 사람은 할머니였다.

이런 존재가 내 인생에 없었으면 버티기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를 좋아하나 보다. 

할머니가 준 사랑을 다 못 돌려드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덩그러니 할머니와 추억을 꺼내본다.


잠만보 할머니도 이제 아들 딸 손녀 걱정 없이 편하게 주무시겠지. 

할머니랑 기차 타고 먹던 사카린에 찐 여름 옥수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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