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에 대한 어떤 것 ep.08
아 그냥 갑자기 집안일 생겼다고 하고 집에 갈까... 배 아프다고 할까...
동호회 첫 모임을 가는 길, 이 생각을 수백 번 수만 번 되뇌었다. 만남 장소에 도착해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 그냥 집에 갈까.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겨냈는데, 무척 유치한 생각일 수 있으나 내겐 큰 도움이 됐으므로 공유한다.
나는 자유로운 어른이고,
학생 때처럼 의무적으로 해야 해서 운동하러 가는 거 아니잖아.
가서 마음이 힘들면 언제든지 '저 이만 갈게요~'하고 나올 수 있는 자유가 있어.
계속 참여할 수 있는 자유도 물론 있고. 네 마음대로야. 편하게 생각해.
그래서... 첫 모임에 갔다고 한다. 그 모임은 초보 러너 모임이었는데, 생각보다 편안한 모임에 놀랐고, 캐나다에 올 때까지 3개월간 활동했다.
또 다른 모임은 조금 더 체계적으로 뛰는 모임이었는데, 정말 '러닝'에 집중한 동호회로 금요일 밤마다 내 다리를 책임져 줬다고 했다. 거기선 오래 잘 뛰는 법을 배웠다. 이곳에서도 3개월간 활동했다.
두 모임 활동을 토대로 '동호회 활동 초기'에 도움이 될 만한 팁 4가지를 추려봤다. 아니 솔직히 인간관계 만렙인 사람들은 안 봐도 좋은 팁이다. 뭐 이런 걸 다 쓰냐 할지도 모른다. 근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당연한 것도 한번 상기해주면 어느 모임에 가든지 용기를 낼 수 있더라.
그럼 스타트.
1) 나와 동갑인 사람
동호회 활동은 거의 20대 후반/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직장생활이 안정화된 후 여러 가지 활동을 찾아다닐 여유가 있는 나잇대라 그런 듯했다. 나 역시 이 범주에 드는 나이.
그래서인지 별로 놀랍지 않게 동갑을 만날 수 있다. 회사에서는 동갑이라도 말을 놓기 힘들지만, 동호회는 동호회잖아? 친구잖아? 사모임이잖아? 거침없이 말을 놓고 친구가 된다. 아...우리 말 놓을까? ^^ㅎ 머리통에서 땀이 삐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말 한마디면, 동호회 활동은 쉬워진다. 친구 +1은 덤.
2) 운영진
동호회 운영진은 일단 사람이랑 모이는 게 좋아서 동호회를 만든 장본인이다. 보통 성격이면 동호회 만들 용기도 못 내지. 그래서인지 내가 본 운영진들은 모두 굉장히 사람을 잘 챙겼다.
처음 온 사람들 이름은 꼭 외우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러닝할 때도 조금 뒤처진다 싶으면 뒤에 와서 끝까지 달릴 수 있게 함께 천천히 뛰어줬다.
운영진이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색하면 운영진 주변에서 서성거리면 됨.
3) 어색하면 가만히 있어도 됨
대학교 1학년, 인간관계에 정말 혼란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동기들을 따라 계속 어디를 돌아다녀야 하고 먹기 싫은데 밥 먹어야 하고 밤에도 술 마시러 가야 하고 그 모임에서 빠지면 학과에서 아싸가 될까 걱정했던 시절.
인간관계 초보였던 스무 살의 우리는 이젠 커서 어른이 됐고, 그러지 않아도 '나답게'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모임에 가끔 빠진다고 아싸가 아니라는 걸, 아싸이면 또 뭐 어떤가. 이런 생각을 배웠다.
동호회도 마찬가지. 평화로운 동네였다. 중고딩처럼 왕따 시키고 그런 것도 없었고, 나오면 나오는 사람끼리 그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는 게 동호회원들끼리의 목표였다. 가만히 있어도 아 뭐 그런 사람인 갑다~ 하며 포용한다.
4) 뒤풀이는 일단 감. 가만히 있어도 됨22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뒤풀이였다. 일단 뒤풀이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이벤트고, 앉는 위치에 따라 그날의 '재미도'가 결정되는 복불복 같은 면이 있다.
뭐 동호회 뒤풀이도 다르진 않지만, 어색하고 불편하면 별말 안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다. 직장 상사가 체크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성적 매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잃을 것 하나 없는 사모임인데 가만히 있으면 또 어떠랴?
러닝 뒤풀이는 죽어라고 부어라 마셔라 안 하더라. 간단히 맥주 마시며 더위 날리는 게 뒤풀이의 주목적이었다. 사람들이랑 간간히 이야기하다 보면 다음 모임 참여에 용기가 생긴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에 지쳐 있다가, 러닝 동호회 시작하면서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그 사람의 삶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고 위로를 얻고, 예상외로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하고, 동호회가 아니었다면 못했을 경험들을 풍성히 누렸다.
캐나다에서도 러닝 클럽을 찾는 중인데, 아직 쉽지 않다. 혹시 토론토에 러닝 클럽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추천 부탁드려요.
동호회 첫 모임 후기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토요일 밤에 호다닥 적어봤어요. 이제 가을이고 한국은 뛰기 좋은 날씨가 됐겠네요. 모두 좋은 동호회 만나셔서 즐거운 가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Cheers!
*소심한 관종*을 소개합니다.
권귤의 사생활 -> https://www.instagram.com/soooyeon.k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