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화창했던 여름,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아빠가 시골집을 찾았다. 커다란 꽃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와 함께였는데 지난번 아빠 가게에서 본 여자가 아니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논에 물을 대는 일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가뭄에도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를 뽑는 일로 무척이나 바빴기에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수돗가에 앉아서 쌀을 씻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아빠와 젊은 여자를 보고 얼떨결에 "어! 아빠."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급하게 다가온 아빠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게 아빠 없이 커서 나만 보면 계속 아빠라고 부르네. 삼촌한테!"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뒤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눈을 접어 웃으며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훅 끼치는 강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어질 거렸다.
여자의 인사를 무시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마저 쌀을 씻었다. 아빠는 손님이 왔는데 커피도 한잔 내오지 않냐며 나를 타박하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디 갔냐고 소리를 질렀다. 논에 갔다는 짧은 대답만 한 채 밥통에 쌀을 안치고 곧장 아궁이로 가서 소에게 먹일 여물을 뒤섞었다.
아궁이 옆으로 쫓아온 아빠는 내 머리를 세게 내리치며 빨리 가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불러오라고 했다. 들은 체 만 체하며 일부러 오랫동안 여물을 뒤적거리며 뭉그적거리자 아빠는 나에게서 나무 작대기를 뺏아 들더니 당장 논에 가서 두 분을 데려오라며 얼굴을 내리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하는 수없이 논으로 향했다. 길가에 활짝 핀 꽃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어 논으로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바빠서 못 내려간다고 했다. 바쁘지 않아도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참을 두 분과 함께 있다가 집으로 내려갔다. 아궁이에 올려둔 소여물이 타버릴까 걱정이 돼서 계속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니 아빠는 그 젊은 여자와 함께 토마토를 잘라 설탕을 뿌려 먹고 있었다. 사람도 없는 집에서 허락도 없이 냉장고를 뒤졌나 싶어 괜히 짜증이 났다.
두 분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바빠 청소할 겨를도 없어 엉망이었던 집에 화가 난 것인지 "집 청소 안 하나? 집 꼴 좀 봐라! 엄마 없이 자란 티가 이런 데서 딱 난다!"라고 말하며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너무 아파서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서럽게 우는데 아빠는 또 운다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뒤로 그 젊은 여자는 아빠와 함께 세 내번 시골집을 더 찾았다. 여자는 올 때마다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세내 권씩 빌려다 주었는데 중간중간 삽화가 그려진 책이 제법 재미있었다.
그해, 여름의 끝자락쯤 '작은 아씨들'을 빌려다 준 여자는 더 이상 시골집에 오지 않았다.
책 대여점에서 빌린 듯한 책은 대여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손톱으로 살살 뜯어 없애 버리곤 꼭 내 책인 것처럼 생색을 내며 친구들에게 빌려주곤 했었다. 그 여자가 알아서 대여점에 책값을 물어줬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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