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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an 22. 2021

꿈과 성, 날아 올라 라라.

영화 「걸」


[트랜스젠더(transgender)]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자신이 반대 성의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


'성(gender)'을 바꾼다는 것. 타고난 신체와 성 정체성이 맞지 않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분명 여자인데, 여자가 맞는데, 신체구조는 남자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런 이유로 겪었을 혼란스러움부터 어려운 결정을 했을 용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안타까움이 온 마음을 지배한다. 인정하기 싫고 거부감까지 드는 신체에 갇혀 있는 것도 힘이 들지만, 그보다 더 상처가 되는 것은 신체와 다른 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선입견일 것이다.


이 영화는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사춘기에 놓인 소녀 라라가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며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와 아름다운 색감의 미장셴으로 풀어낸다. 뒤늦게 성전환을 결심한 예는 보아왔으나, 사춘기에 놓인 소년 소녀가 성전환을 이미 결심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는 예는 처음이다. 성인이 겪는 성 정체성의 혼란과 사춘기 소녀가 겪는 성 정체성 혼란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며, 주변 사람들(특히 또래집단)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한다. 영화 「걸」은 그 차이점을 잘 조명하여 섬세하게 표현한다.



[가족]

라라의 가족들은 대단하다. 그리고 라라에게 그런 가족이 있어 다행스럽다. 지지체계가 견고하다는 것, 결심을 도와주고 기꺼이 나서 보호해 주며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큰 복이다. 트랜스젠더라는 힘든 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한 위로라도 되는 듯 말이다.


아내 없이 자녀 둘을 키우면서, 라라의 성전환 수술을 받아들이고 지지해 주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빠 마티아스는 가장 놀랍고도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외국인이라서'의 이유로 넘어가기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성과 태도다. 딸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부터가 무척 힘들었을 결정이었음에도, 수술 준비를 위한 진료과 검사들을 위해 동행하고, 시시각각 변하며 그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사춘기 소녀의 기분과 정서를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노력까지.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이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마티아스로 인한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급작스레 자고 있는 방에 찾아와 울먹이는 라라에게 아빠 마티아스가 건넨, '네가 얼마나 용감하지 스스로 모르는 것 같다.'라는 말과 생일날 노란 니트를 입고 가족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라라의 모습에 유독 눈물이 났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며 라라를 응원해 주는 가족들의 따뜻한 말들과 밝고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라가 내 마음까지 노랗게 물들였다.


성급한 위로나 이기적인 조언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포옹이 진정한 위안과 감동을 전한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또래]

그러나 라라와 같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친구들은 그 사정이 다르다. 라라의 성 정체성을 여성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신체적 조건이 아직 남성인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자인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듯 보이지만 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 반을 배정받아 처음으로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라라와 함께 탈의실을 사용하는 것에 불만이 있냐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해버리는 배려 없는 선생님, 샤워실에서 벽만 보고 온몸을 팔과 손으로 가린 채 제대로 된 샤워조차 하지 못하는, 어색하게 벽만 만지작거리는 라라, 여자들끼리 모인 파자마 파티에서 라라에게 성추행과 같은 정서적,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친구들.


사춘기 시절은 모두가 예민하고 미성숙하다지만, 그런 이유로 친구들이 라라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무척이나 잔인하다. 그 시기를 모두가 거쳐왔기에 '다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함께 어울리기 꺼려지는 마음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방에게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은 가하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은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 보호법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따뜻함까지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상처를 주지만 않았더라면, 라라가 그 선택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곱씹어 본다.


폭력과 소외, 차가운 시선은 조급한 라라의 마음에 불안함을 던져 가속시킨다.



[발레리나]

라라가 선택한 직업은 발레리나. 굴곡이나 유연성 등을 필요로 하며 여성성이 특히나 강조되는 직업이다. 이미 사춘기를 지나고 있어 선이 굵어지고 유연성이 줄어들고 있는 라라에 비해, 여성의 신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발레를 해왔을 다른 친구들의 조건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리하다. 이런 라라에게 발레는 사실상 극한 도전과도 같다.


발레리나와 어울리지 않게 외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신체적 특수성을 가리 위한 라라의 전투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테이프를 붙였다 뗄 때마다 고통스럽고, 피부가 상하고, 염증이 생긴다. 테이프를 붙이는 행위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포기할 수 없다. 발레를 하는 동안 테이프를 붙여야 하고, 그동안은 화장실도 가지 못한다. 연습 후 제대로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누구에게 들킬세라 문을 잠그고 고통 속에서 테이프를 떼어낸다. 가끔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창문을 조금 열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어 본다.


관객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라라의 꿈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한다. 여자가 되는 꿈과 발레리나가 되는 꿈, 그 둘을 모두 이루길 바란다.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인생의 기로에 서고, 인생 최대의 선택이 될 수 있는 결정을 하고, 그 어린 나이와 몸으로 버티어 가는 일에 무한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동작을 할 때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통증을 꾹 참고,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을 원망도 했다가 다독여도 봤다가, 혼자 남아 연습에 매진하는 라라의 모습은 보는 이도 힘에 겹다.


이렇게까지 해서 발레리나의 꿈을 이루어야 하는 걸까.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못한 나는, 그런 열정이 부러우면서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분명 꿈을 가진 것, 그리고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 꿈을 실현시키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꿈을 이루는 것이 무조건 옳은 일이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빅터 폴스터]

벨기에 무용수인 그의 첫 연기는 흠잡을 곳 없다. 사실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에 관한 영화인 줄 몰랐다면, 주인공이 여자 배우라고 믿었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라라를 연기하고 있는 빅터 폴스터가 남자임을 알고 보더라도, 중성적인 매력에 깜짝 놀라고 만다. 어떤 모습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자인데, 어떤 각도에서는 너무나도 남자다. 목소리 또한 그 중성적인 매력이 넘친다.


여기서 「대니쉬 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니쉬 걸」의 에디 레드메인이 섬세한 동작과 표정으로 릴리의 여성성을 표현했다면, 이 영화 「걸」의 빅터 폴스터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라라를 표현했다. 에디는 처음 맞닥뜨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혼란, 그리고 호기심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비춰보고 여성스러운 손동작과 포즈를 취해가며 눈을 빛내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금까지 여성성을 표현하는 연기는 에디가 최고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걸」의 빅터 폴스터를 마주한 순간, 머리가 울렸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일부러 의도한 것이라 하더라도) 에디의 표현 방식과는 다르게 빅터는 라라 그 자체였다. 과장하거나 의도한 손짓 몸짓 눈빛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럽다 못해 빅터가 트랜스젠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의 수준 높은 동화였다.


빅터 폴스터가 무용수이기에 더 좋은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기에 고정된 이미지가 없어 관객들로 하여금 라라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적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백지에 원하는 그림을 그리듯.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연기를 기대해본다.



덧, 라라가 성전환으로 여자가 되려는 것과 남자 혹은 여자를 좋아하는 성적인 측면은 별개의 문제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성 정체성과 성적 취향은 다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의 이해력 밖의 영역이니 간과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또 다른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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