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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an 26. 2021

픽사가 건네는 또 한 번의 위로.

영화 「소울」


[삶의 목적, 혹은 목표]


「소울」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그 메시지에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삶의 목표나 그 목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적어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충고와 조언이 가득 담긴 훈화적 메시지를 들어왔다. 그에 익숙해진 탓에 꿈을 좇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꿈을 가지지 못한 자는 남은 인생 동안 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마치 ‘인생의 루저’라 취급당할까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최근에 본 영화 「걸」의 리뷰를 쓰면서, 나는 왜 저렇게 열정을 쏟고 인생을 걸만한 꿈이라는 게 없을까, 자책 어린 생각을 했었다. 꿈을 위해 몸과 정신을 한계로 몰아붙이며 노력하는 라라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내게 「소울」은 말한다. 인생의 목적이나 삶의 목표가 없어도 된다, 명성을 얻어 이름을 남기는 훌륭한 위인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재능이나 꿈이라는 것은 결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그런 것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이 바로 삶이다,라고. 오히려 꿈 혹은 목표만을 좇다 집착에 휩싸여 길 잃은 영혼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고.


처음 「소울」을 감상한 직후에는 이 커다란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를 몇 차례나 다시 보고, 이동진 평론가의 랜선 GV를 보고, 수차례 영화를 곱씹으며 깨달았다. 이 영화를 처음으로 보고 나서 마음속을 떠다닌다고 느꼈던 울렁거림의 실체가 ‘위로’였다는 것을.


픽사는 이렇게 또 한 번의 위로를 건넨다.



[영혼]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사실 나는 영혼이나 영적 세계를 믿지 않는다. 믿기 힘들다거나 혹은 믿고 싶지 않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내 인생은 여기에서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데,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영적 세계로 편입되어 새로운 사후세계가 펼쳐진다니. 그럼 진정한 ‘죽음’은 언제 찾아온다는 말인가. ‘나의 끝’은 정녕 없다는 말인가. ‘천국’과 ‘지옥’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영혼의 사후 행방을 나누는 것일까, 죄의 무게가 그 기준이라면 셀 수 없는 죄의 종류와 천차만별의 무게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다룬다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을 ‘신’이라는 존재가 결정하는 것일까. 벌써 수많은 의구심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인다.


이렇게 말하는 내게, 소수의 적은 이들은 공감했고, 대부분의 많은 이들은 ‘차갑다, 냉정하다, 사람 냄새가 안 난다, 쓸쓸하다, 외로워 보인다’ 등의 부정적인 말들을 건네 왔다. 그 이후로 어쩌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도 구태여 나쁜 인상을 심어주기 싫고 반론하며 대립하기 싫어 생각을 숨기고 침묵한 적도 있다.


그런 내게 「소울」은 ‘영혼’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어쩌면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보기에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혼’이 이런 형태라면, ‘태어나기 전 세상’과 ‘머나먼 저세상’이 이런 모습이라면, 어쩌면 한 번쯤은 속는 셈 치고 믿어 볼만하다,라고.




[일상]


무의미한 삶과 이제 안녕하고, 고대하고 바라던 새로운 삶을 맞이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두고 삶을 마감해야 할 위기에 처한 조. 포기하지 않는 노력과 22에게서 빼앗은(?) 지구 통행증으로 원하던 날을 살아낸 뒤 느끼는 기쁨과 행복, 설렘과 흥분, 성취와 환희로 차오르는 격한 감정. 그리고 밀려드는 허무함.


허무와 공허는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허무감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조에게 도르테아가 건네는, 바다에 있으면서 바다를 찾는 젊은 물고기의 이야기는, 꿈만 좇다 일상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 대한 충고다. 꼭 거창하게 ‘꿈’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은 무언가를 갈망하고 고대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애타게 바라고 간절히 원해 얻어낸 그 무언가 혹은 누군가 또는 그 어떤 것, 그것만 가지면 행복하여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삶은 계속되기에, 밀려드는 허무와 공허를 메우는 방법을 알기도 전에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게 되고, 그 후 찾아드는 허무를 마주하길 반복한다.


계속되어 사소해 보이지만 일상을 채워 나가는 것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과거로 돌아가거나, 살았던 하루를 다시 그대로 살며 일상의 소중함을 말한다. 영화 「소울」은 조의 몸속에 들어간 22와 고양이 몸속에 들어가 자신의 삶을 타자의 눈으로 보게 되는 조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말한다.



회색빛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매일이 컬러풀한 빛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매일 3끼 또는 2끼 규칙적으로 먹는 음식이 살기 위해 먹는 단순한 식량이기보다 건강한 음식을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시끄럽고 거슬리는 지구의 소음 속에서 웃음과 대화를 발견하도록,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신선함을 느끼도록,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떨어지는 낙엽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당신의 일상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길 바란다.




[관계]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빼놓지 않고 언급할 에피소드는 이발사 ‘데즈’다. 데즈와는 항상 재즈 얘기만을 해 왔으므로, 재즈 얘기를 하면 조의 모습인 22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설명하던 조에게, 그동안 조가 묻지 않아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말하는 데즈는 우리 모두에게 조그마한 충격의 파장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보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 사람을 겪어본 바로 서’ 등의 말을 하며, 그동안의 경험을 그 증거로 내세울 때, 관계의 중심은 언제나 ‘나’다. 착각과 오해를 바탕으로 한 판단은 때때로 관계를 위협할 수 있음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물어주어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 데즈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아차!’ 싶은 마음이 든다. 잘 알고 있다 여긴 사람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민망함과 미안함은 비단 혼자만 느껴본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음악]


「소울」의 최고는 단연 음악이다.


'재즈 영화'를 떠올려보면, 당장 생각나는 영화는 「위플래쉬」와 「라라 랜드」, 「본 투 비 블루」, 「피아니스트의 전설」 정도이며, 재즈를 잘 알지 못하는 데다, 어렵게 느끼는 영역이기도 하다(「치코와 리타」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제야 조금씩 재즈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는 초보에게도 「소울」의 음악은 인상 깊다.


지구에서는 재즈가 흐르는 반면, 'The Great Beyond'와 'The Great Before'에서는 전자음이 흐른다. 재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듯, 지구가 비치는 장면에서만 혹은 조와 관련된 장면에서만 흘러나온다. '태어나기 전 세상'과 '머나먼 저세상'으로 화면이 전환되는 순간 재즈는 전자음으로 바뀌고, 분위기가 급격하게 전환된다.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다.


조의 감정에 따르는 재즈는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잔잔하게 흐르기도 하고 에너지 넘치게 폭발하기도 하는 이 선율은 영화를 이끌며 완급 조절을 담당한다. 조가 오디션을 마치고 도로테아 밴드에서 연주하기로 약속한 뒤, 고대하던 삶을 눈앞에 둔 조의 설렘과 흥분을 표현하는 신나고 경쾌한 'Collard greens and cornbread strut'. 오프닝에서 자신이 재즈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할 때와 22를 만나기 위한 무아지경에서 연주하는 조의 대표곡 'Born to play'. 도로테아가 등장하며 연주하는 색소폰 솔로 'Bigger than us'. 지구 포털로 점프할 때 흐르는 'Jump to Earth'.



재즈가 캐릭터의 감정에 따라 관객들의 마음도 함께 움직이게 했다면, 전자음은 픽사가 상상한 사후 세계에 신비함과 몽환적 분위기를 더한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은 'Terry time'이다. 철두철미하고 까다로워 보이지만 매력과 귀여움이 철철 넘치는 테리의 성격과 모습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음들이 나열된다. 음들을 듣고 있노라면 뾰로통해 보이는 테리의 표정과 그림자와 선을 따라 움직이는 테리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오프닝에서 칠판에 쓰여 있던 'Things ain't what they used to be.'라는 노래 제목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섬세함이 픽사 애니메이션을 돋보이게 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영상]


애니메이션의 기술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영화를 감상하기 전 SNS에서 「소울」의 디테일에 관한 짧은 영상을 보게 되었을 때부터 기대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소울」은 그 기대를 뛰어넘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선명한 명암 대비와 엄청난 색감을 자랑하는 돌비로 관람할 때, 그 영상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호두파이, 머리카락, 엄마의 스웨터, 뉴욕 도시 전경 등 많은 디테일들이 자랑거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로테아의 등장 신이다. 앞서 언급한 음악도 음악이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며 실물과 다를 게 없는 색소폰과 조명을 한껏 받은 도로테아의 실루엣이 실제 사람이 연주하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아쉽게도 2D 일반관에서는 이 정도의 영상미를 마주할 수 없었다.)



「소울」은 지구와 지구 밖 세상을 음악으로 나누지만, 영상으로도 그 차이를 명확히 한다. 지구의 세상은 직선과 곡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3D의 모습이다. 지구 밖 세상은 흑과 백,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2D의 모습이다. 조의 영혼이 '머나먼 저세상'으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벗어나 '태어나기 전 세상'까지 오는 여정은 시공간을 넘나들지만 선과 흑백으로 이루어진 2D로 표현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러다 조의 영혼이 깜깜한 어둠으로 떨어지며 모두를 긴장시키고, 순간, 디즈니와 픽사 로고가 뜬다.


'아, 이게 바로 픽사지! (with 디즈니)'



'머나먼 저세상'의 끝은 블랙홀처럼 표현되며, '태어나기 전 세상'은 푸름과 보라, 분홍과 노랑이 뒤섞인 파스텔톤이다. 동그란 지구 안에 많은 네모들이 있고, 동그란 웜홀로 떨어진 조 위로 사각의 악보가 휘날리고, 조의 영혼은  머나먼 저세상 원을 마주한다. 공간을 찢고 나오자 선과 네모로 이루어진 사이 공간을 지나고, 동그랗고 부드러운 태어나기 전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영혼은 동그란 지구 포털을 통하거나, 문윈드의 지팡이가 만드는 동그란 포털을 통해 지구로 향한다.


동그라미와 네모, 선과 점, 색과 흑백으로 각각의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재밌다.



[캐릭터]


그동안 픽사가 소개한 캐릭터들 중 '제리'와 '테리'만큼 모두가 인정하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모든 것을 상징하는 그들이 미개한 인간을 고려하여 선으로 이루어진 형상을 띄고 있다는 것부터가 픽사의 상상력에는 한계 없다는 증거다.

(이에 필적할만한 캐릭터는 「인사이드 아웃」의 다섯 캐릭터, 조이, 새드니스, 디스 거스트, 피어, 앵거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웹툰 '유미의 세포들'을 본 뒤에 이들을 만났기에 신선함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테리가 지구에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그림자와 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가장 인상적인데, 바이탈 사인 모니터의 심전도(EKG)와 각종 전선, 철제 울타리와 바닥의 선, 신호등의 사람 모양, 벽의 그림(하필 테리 이미지와 딱 떨어지는 몬드리안) 등을 따라 움직이며 기발함과 재미를 준다. 또한 테리는 하나의 모습과 목소리를 가지지만, 제리는 그 모습이나 목소리가 여러 명의 형태인 점이 「소울」 캐릭터의 정점이다.



영혼들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는 몽글몽글한 형태로 존재한다. 스치는 경계엔 무지갯빛이 담겨 있다. 푸르지만 보드랍고 따뜻할 것만 같다 (이런 영혼이라면 나에게도 하나 꼭 있었으면 싶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영혼들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영혼이 몸의 중앙(심장 부근)에 존재하다 '퐁'하고 분리되는 장면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귀엽다. 천진난만하게 꺄르르 웃고, 다른 영혼을 따라 하거나(조의 모자와 안경), 서로를 때리며(심지어 던져져도 재밌다고 웃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아기 영혼들은 마음을 간지럽힌다.


사람으로 태어나길 거부하다 삶의 의지를 얻고 지구로 내려가는 22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태어나 생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이겨내고 생의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조와 코니, 문윈드와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열정을 말하고자 한다.



한 영화에서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난다는 건 언제나 셀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짧은 등장임에도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건 고양이 영혼♡)




[스토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조가 생을 유지하려 하려 발버둥 치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과 태어남으로써 지구에서 살아야 하는 생을 거부하던 22가 조의 몸으로 지구를 경험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것. 지구를, 나아가 우주를 벗어난 생전과 사후 세계. 부모가 바라는 안정적인 삶과 자식이 원하는 꿈을 위한 삶. 원하던 삶이 일상이 되어버린 도로테아와 이제 막 원하던 삶을 딱 하루 살아본 조.


대조를 통한 이야기는 우리네 삶을 논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길 잃은 영혼에서 벗어난 22에게 조가 '난 한 번 살아봤으니 괜찮다, 이제 너의 차례다'라 말하며 지구 통행증을 내미는 순간,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삶에 뭉클해져 눈물이 났다. 지금껏 '조상, 선대'라고 하면 나와는 먼 이야기로 여기며,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가는 등의 풍습들도 그저 현대인의 삶에 부합하지 않는 유교 사상의 잔재라고만 생각하며 꺼려 해왔다. 그들이 존재했기에 내가 존재하며, 그들이 피땀을 흘려 일구었기에 현대의 내가 편한 삶을 누린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 했던 게 사실이다. 조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앞둔 22를 응원하는 순간, 내게 삶과 시간, 유산을 물려준 이들을 잠시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후대에 어떤 지구를 남겨주어야 하는지도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세계를 구축하고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며, 고마운 일이다.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 픽사의 이전 작품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위플래쉬」, 「인터스텔라」, 「신과 함께」, 「조커」, 영혼이 바뀌는 영화들이 생각나는 영화.


픽사에 길이 남을 영화가 이렇게 또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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