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비과학적인가, 한의학은 미신적인가.
한의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 한의학을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미신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한의학을 믿는다고 하며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 중에서도 한의학은 과학적인 것과는 관계가 먼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종종 민간요법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런 경우를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한의학이 정말 비과학적인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의문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우선, 과학에 대한 정의부터 알아야 과학적이니, 비과학적이니,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은 영어 사이언스 (science)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수입된 말이다. 사이언스는 라틴어 ‘스키엔티아 (scientia)’에서 유래한 말로, 지식이나 앎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 단어였고, 처음부터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사이언스,과학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18세기 이전의 과학자들 – 대표적으로 뉴턴 – 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자들이 아니었고, 자연철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야 과학자라는 말이 생겨났고, 과학이 제도화되고,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과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이다.
현재의 과학이 시작되었던 원류를 찾아서 올라가면, 일반적으로 철학자로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수학의 피타고라스 정리로유명한 피타고라스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들은 고대 동양 사상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계의 변화를 탐색하고 그 원리를 알고자 했다. 왜 해와 달이 뜨고 지는지, 밤하늘의 별들이 움직이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타고난 지적 호기심인 것 같다. 동양의 오행사상과 비슷한, ‘4원소’ – 땅, 물, 불, 바람 – 설이 등장했고, 뒤이어 나타나는 철학자들도 각기 나름의 주장으로 우주와 자연계를 논증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서양, 즉, 유럽의 과학적 전통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두지만,그렇다고 그리스 철학이 지속적으로 유럽에서 이어져 온 것이 아니었고, 한참의 공백이 있은 후에,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유입된다. 이때부터 그리스 과학의 논증 정신과 아랍 과학의 실험 정신이 합쳐져서 근대 과학의 모습을 서서히 띠기 시작한다. 이런 논증과 실험을 통해서, 많은 이론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다시 그 이론들이 새로운 이론들에 의해 전복되기도하는 등의 역사가 몇 백년동안 계속되면서 현재의 과학이 모습을 이뤄갔다.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정확한 정의 설명이 되지 못 할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가 현재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논증’과 ‘실험’을 통해 명확히 규명될 수 있고, 그 규명을 통해 알아낸 규칙을 토대로 앞으로의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다시, 한의학은 비과학적인가.
한의학은 TV에서 몇몇 한의사들이 나와서, 어디가 아픈 데는 어떤 음식을 먹으면좋다, 어디가 아플 때는 어느 혈자리를 누르면 좋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현재의 한의학은 몇 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론적으로 논쟁을 하면서 이뤄온 결과물이다. 서양의 ‘논증’에 뒤지지 않는다. 단, 부족한 것이 ‘실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임상의 기록들은 무수히 있어 왔지만, 서양의 실험과 같은 형식으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동양 (한•중•일)에 서양의 사상과 실험정신이 과거와 다른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유입되었다면, 한의학에도 당연히 실험 정신이 접목될 수 있지 않았을까,그렇다면 한의학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해본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럽대륙 밖으로까지 넓히려 했던 서양 국가들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동양의 3국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문물을 갑작스럽게 쓰나미처럼 받아들이게 되면서, 기존의 동양의 문명과 지식은 열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고, 서양의 문명과 동양의 것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동화될 수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점차 한의학이 서양 문화권에서 부상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마이너리티 (minority)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고,여러 의학 저널에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통한 논문이 발표되고 있지만, 여전히 충분치는 않다. 한•중•일 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을 읽어봐도, 임상 연구가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fMRI 과 같은 첨단 뉴로이미징(neuroimaging)을 이용한,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지만,이것으로 충분한가 라고 하는 의문이 든다. 한의학이 아직까지는 ‘비과학적’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수의 과학적 연구 방법을 통한 논문이 세계적인 저널에 실리고 있어도 현재까지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이 넓은 한의학 영역 중의 파편에 불과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의학이 ‘비과학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역사적으로 갖지 못했고, 현재의 과학이 한의학을 규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밀하게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미신적이거나 전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확고한 믿음이다.
서양의학의 근본인 자연과학은 절대 절대적이지 않다. 가설이 실험으로 검증되어도 언제나 새로운 가설로 반증될 가능성이 남아있고, 불변한 진리처럼 보이는 현재의 과학 이론과 법칙은 언제라도 반증 가능한 가설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현대 의학도 마찬가지다.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기존의 의학 이론을 뒤엎는 연구 논문과 가설이 발표되고 있다. 미래에 한의학의 과학성을 입증하고 현재의 서양의학의 이론을 뒤엎을 수 있는 연구와 이론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다.
사족일 수 있지만 덧붙이자면,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적으로 입증할 것인가’.
데카르트가 자신의 저서인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서문에서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이미 수년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을 참이라고 인정했던가. 그 후에 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것은 또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따라서 내가 만약 언젠가 학문에서 확고하게 지속할 만한것을 세우려 한다면, 인생에서 한번은 모든 것을 근본부터 뒤엎어 처음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임상에서 기계를 써서 진료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연구 방법으로 씌어지는 논문도 아닌,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과 패러다임으로, 근본부터 뒤엎어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되어야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망상이다.
*참고문헌: 과학인문학으로의 초대, 노에 게이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