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개인적인 일면식도 전혀 없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하루종일 마음 한 쪽이 아리고 답답하다.
어제,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 시장의 행방불명 뉴스를 들은 이후, 의식적으로 뉴스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혹시나 불미스런 그의 선택을 듣게 될까봐. 그런 소식이 내게 전해지는 데미지가 작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렇지만 대한민국 수도의 수장인 그의 부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나 그가 속한 정당의 지지자도 아니고, 서울 시민도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이 스스로의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택하게 되기까지 그 사람 내부에서 일어났을 어떤 절망이나 감정의 회오리를 생각하니, 내 심장 주변이 뻐근해지고 팔다리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 이유에 대해 추측을 내겠지만, 그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내가 서른을 지나 마흔을 향해 나아갈 때, 왜 불교에서는 삶을 '고해, 고통의 바다'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 같았고, 역설적으로 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아름답다고 외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오만하게도 '산다는 것'을 만만하게만 생각했지만, 그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하루하루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살아오고 있다.
어렸을 때는 왜 인간이 살아야하는지, 문득문득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그래, 인간이 왜 살아야하는지 알 수 있었다면 인간 역사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왜 생겨났겠으며, 종교가 왜 생겨났겠는가,'라고 나름대로의 임시적 중간 결론을 내리면서 내 삶의 이유를 찾겠다는 부담을 덜어냈다.
요즈음에는 '산다는 것'은 '살아내는 것'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루어야 할 큰 목표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간 삶의 이유인것 같다는. 현재의 삶이 과거에 이루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타인들로부터 부정당해서 심장이 너덜너덜 해진 누더기 조각처럼 되더라도, 하루하루 꾸역꾸역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이유이지 않을까.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것처럼.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려야 할 의지를 스스로 포기했을 순간의 절망을 또 다른 시지프스인 내가 개미 눈곱만큼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두서없는 글로 내 안의 감정을 추스리면서, 그의 영혼이 이제는 안식을 찾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