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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J Nov 04. 2017

한의대를 시작하다

어릴 때, 큰 병치레를 한 적이 없어 병원을 찾은 일도 많이 없었고, 보약을 몇차례 먹은 적은 있지만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본 적도 거의 없어서, 의학이나 한의학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문과였기 때문에, 진로 결정을 할 때도 당연히 의대나 한의대를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한의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더군다나 미국에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와서 한국 대기업의 미주 본사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파트 타임으로 한의대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100% 자의라기보다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된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시작한 한의학 공부였지만, 공부를 하게 되니 굉장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한문과 동양 고전을 제대로 공부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램이 늘 마음 한켠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한의대는 미국인이 몇 십 년 전에 설립했지만 내가 공부하던 당시는 한인이 소유하고 있던 사립대였는데, 한국어 과정과 영어 과정이 개설되어 있었고, 나는 영어 과정에서 한의학 기초 이론과 본초학을 듣기 시작했다. 굳이 한국어 과정을 두고 영어 과정을 택한 것은, ‘그래도 미국인데 영어로 공부해야지, 한국어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건 이상하잖아?’라는 이상한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의대는 Master (석사) 과정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듯이, 미국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GRE나 GMAT 같은 시험 점수가 필요 없다. 입학조건도 반드시 학사 학위 소지자는 아니다. 물론, 학사 학위 소지자도 많지만, 2년 이상 고등학교 이후의 교육 (2년제 대학이나 4년제 대학에서 2년 이상 풀타임으로 수학한 정도)이 있으면 입학이 허락되고, 풀타임으로 3년이나 4년 정도 다녀야 할 정도의 학점 수를 이수해야 졸업이 된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경우에는파트타임으로도 다닐 수 있는데, 그럴 경우, 5년, 6년이 되어도 학점수를 이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길게 다닐 수 있는 것은아니고, 정해진 기간이 있어서 그 안에 모든 공부를 마쳐야 학점이 인정된다.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중국인 교수들이 영어로 된 교재로 하는 강의라 교수의 영어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강의를 듣는 학생 수는 많지 않았고, 학교 규모나 학생 수나 여러모로 한국의 학원 수준 정도였는데, 영어 수업의 학생 구성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 (영어 원어민들도 있지만, 동남아, 중남미 등 각지의 이민계 학생들 포함)과 약간의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보니, 이 학생들은 삶의 어느 지점에선가 한의를 접하게 되고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한의대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미국 이외의 외국 의대를 졸업하고 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여러 사정에 의해 의대에 다시 진학하지 못하거나 (나이가 들었다거나 경제적으로 힘이 든 경우가아닐까 추측해보지만) 미국에서의 전문의 과정이 힘들 때 (캘리포니아주의 경우는 외국 대학 졸업자가 의사 라이센스 시험이나 전문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의대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배경을 가진 외국 학생들과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놀라게 된 것은 그들의 반짝거리는 눈동자, 열정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한의학을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며가며 문틈사이로 보게되는한국어반의 학생들의 눈빛과는 다른 열정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어반 학생들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무래도 한의학을 더 가깝고 쉽게 받아들이는 한국어반 학생들과는 다른 종류의 열정이다. 한국어반 학생들이 ‘미국 애들은 한의학에 깊이가 없어’라고 하는 말들을 스쳐가듯 듣긴 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생각이 들면서, 그 ‘미국 애들’에게 질 수는 없다는 약간의 오기 덕분에, 오히려 한의학 공부를 더 분발해서 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영어 교재들은 오래전에 한의학 (중국의 한의학, 중의학)을 공부한 서양인들이 중의학 교재를 토대로 집필한 책들이다. 재밌었던 것은 본초 교재를 보면, 하나의 본초에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발음이 영어로 적혀져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면서 한국어 발음만 찾아서 읽어본 적도 있었다. 한의학 본초 중에는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약용으로 씌였던것들이 간혹 있어서 영어로 불리는 이름들이 있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명만 있을 뿐, 쉬운 일반 영어명이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중국어 병음 (pinyin)이 통상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도 계지는 Gui Zhi, 감초는 Gan Cao 등으로 읽고 쓰는 것이다. 


영어로 된 교재들을 읽다가, 어느 한 곳에서 처음으로 절망, 혹은 너무나 큰 안타까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바로 방제학 책의 서문 부분이었다. 세부적인 방제학 설명에 들어가기 앞서, 방제학의 역사와 기본 설명을 서술한 서문이었는데, 당연히 중국의 방제학 역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일본 방제학 역사도 짧게 설명되어 있었던 반면, 한국 방제학에 대해서는 일본 방제학 역사 설명에서 짧게 언급되어 있었다.


“A similar process has occurred in Korea resulting in the development of unique form of herbal medicine with a distinctively Korean character. Unfortunately we have not been able to locate sources that would allow us to present a discussion of Korean herbal medicine. We hope to correct this omission in future editions.”


“일본과 비슷한 과정으로 한국에서도 특유의 방식으로 발전되었다.안타깝게도 한국 방제학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 판본에서는이 누락이 고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의 방제학에 대한 설명은 빠져있는 것이었다. 영어로 제대로 소개된 한국의 한의학, 방제학에 대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일본의 경우는 오오츠카 케이세츠(대총경절, 大塚敬節)의 『한방의학』이 영어로 번역된지 오래되었지만, 한국의 ‘한방’에 대한 책은 지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한의학을 미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몇 가지가 서로 섞여 사용되는데, Traditional Oriental Medicine (TOM), TraditionalChinese Medicine (TCM)등이 많이 사용된다. 한의대를 졸업하면 MAOM 이라는 학위 타이틀이 붙는데, 이것은 Master of Acupuncture and Oriental Medicine의 약자이다. Oriental이라는 용어가 동양을 낮춰보는 의미가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한의학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을 딱히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 한의학이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된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중국인들의 이주 역사와 문화 교류와 관련이 있는 탓에, TCM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는것 같다. 미국인들은 그다지 거부감 없이 TCM이라고 한의학을 간략하게부르지만, 한국을 뿌리로 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해도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고 그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도않다. 


당시로서는, 내가 한의학 공부는 시작했지만, 미국의 한의사가 되겠다고 계획하지 않았다.한의사가 되지 않을 거라면 시간과 돈을 들여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어 잠시 학교를 쉰 적도 있었지만, 다시 한의학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그만큼 한의학에 매력적인 뭔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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